뜨득 황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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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중반 [[베트남]]의 [[가톨릭]] 교도가 45만 명으로 늘어나자 뜨득은 대대적인 [[기독교]] 탄압으로 [[1840년]]~[[1860년]]까지 유럽인 선교사 25명과 [[베트남]] 성직자 300명을 처형하여 2만 명의 신도가 죽었고 그들의 마을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는 [[영국]]과 연합하여 [[제2차 아편 전쟁]](1858년~1860년)을 치르는 한편<ref name="신승하"/>{{Rp|335~337}} 인도차이나에 프랑스 식민지를 구축하기 위한 단계들을 밟아 나갔다. 1857년 [[스페인]]의 [[호세 마리아 디아스]](San Jose María Díaz Sanjurjo) 신부가 살해되자(→[[:en:Thomasian Martyrs|Thomasian Martyrs]])<ref>{{웹 인용 |url=http://www.saintwiki.com/index.php?title=OP_Calendar/Martyrs_of_Vietnam |title=OP Calendar/Martyrs of Vietnam |확인날짜=2018년 8월 28일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70819231328/http://www.saintwiki.com/index.php?title=OP_Calendar%2FMartyrs_of_Vietnam |보존날짜=2017년 8월 19일 |깨진링크=예 }}</ref>, [[나폴레옹 3세]]는 프랑스의 [[로마 가톨릭]] 선교사들에 대한 베트남의 박해에 응징하고 베트남 조정에 프랑스군의 베트남 주둔을 강요하고자 전쟁의 개시를 승인(1858년)하였다. 이로써 [[1858년]]부터 베트남과 프랑스는 전쟁에 돌입하였다. [[프랑스 해군]]은 [[리고 드 주누이([[:fr:Charles Rigault de Genouilly|Rigault de Genouilly]]) 제독 지휘하에 [[다낭]]과 [[사이공]]을 점령(각각 1858년 9월 1일과 1859년 2월 17일)하였다. 그리고, 남부 [[베트남]]의 요충지에서 베트남군을 패퇴시켰다. 프랑스는 1861년에는 대대적인 침략을 감행하였다. 결국 뜨득 황제는 [[1862년]] 항복하고 만다. 프랑스와 베트남 간에는 불평등 내용을 담은 [[사이공 조약]]을 체결하고<ref name="신승하"/>{{Rp|335~337}} 전쟁은 종결되었다.(→[[베트남-프랑스 전쟁]]) 사이공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 남부 [[베트남]]의 [[비엔호아]],[[쟈딘]]<ref>쟈딘(Gia Định)은 현재의 [[호찌민 시]]를 말한다. </ref>, [[딘뜨엉]](Định Tường) 3개주<ref>나중에 프랑스는 이를 [[코친차이나]]라 명명하였다.</ref>를 할양한다.(2)
# 베트남은 프랑스에게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지불한다. (3)
# 프랑스의 전함이 [[메콩 강]]을 자유항해하는 것을 허용한다.<ref>이로써 1867년 프랑스는 캄보디아를 점령하고 보호국화하였다.</ref>(4)
# 프랑스의 베트남 내에서의 자유로운 가톨릭 포교 특권을 인정한다. (5)
# 3개의 항구를 프랑스와의 무역을 위해 개항한다. (6)
# 베트남이 다른 나라와 교섭할 때 프랑스 황제의 동의를 받도록 한다.
 
[[1867년]] [[프랑스]]는 남부 [[베트남]]과 [[사이공]]을 점령하고 [[코친차이나]]로 개명했고 [[1865년]]에는 [[레 왕조]]의 후손이라 자칭하는 사람의 반란까지 일어났다. 결국 뜨득 황제는 [[유럽]]에 개방을 하고 [[청나라]]에 원군을 요청했으나 실패했다.
 
[[1867년]] [[태평천국]] 계통의 오곤(吳鯤)의 [[흑기군]](黑旗軍)이 침입해와서 프랑스와 대립하였다. [[1882년]] 흑기군과 프랑스군 사이에 전투가 벌여졌으며, 다시 뜨득의 구원 요청을 받은 청나라군도 출병하여 [[청불전쟁]]으로 발전하게 된다.
 
[[1883년]] [[7월 9일]]에 뜨득이 승하했다. [[천연두]] 후유증으로 고자였던 뜨득은 아들이 없어 조카인 [[죽득(육덕 황제]](育德))이 즉위를 하지만, 이틀 만에 폐위되고 [[히엡호아(협화 황제]](協和))가 옹립되었으나 그도 중신에 의해 독살되고 만다. 이후 즉위한 [[끼엔푹(건복 황제]](建福))도 즉위한 지 반년 만에 죽고, 동생인 함응(함의[[함응이 황제]](咸宜))이 즉위를 하게 된다. 짧은 시간에 [[응우옌 왕조]]의 여러 군주가 대를 잇는 극심한 혼란 속에서 청불전쟁은[[청불전쟁]]은 프랑스의 승리로 끝나고,응우옌 왕조는 프랑스의 보호국으로서 명맥을 유지하기에 이른다.
 
== 같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