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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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의 한성부의 구역은 오늘날의 서울보다 훨씬 협소하였다. 동쪽은 [[낙산|낙타산]], 서쪽은 [[인왕산]], 남쪽은 [[남산 (서울)|목멱산]], 북쪽은 [[북악산|백악산]]으로 둘러싸인 분지가 그 터전으로서, 성 밖의 일부 지역도 관할하였지만, 조선 건국 당시에는 원칙적으로 성 안의 구역만을 ‘한양’이라 하였다.<ref>{{서적 인용 |저자=손정목 |제목= 조선시대 도시사회연구 |연도=1977 |출판사=일지사 |쪽=35 }}</ref>
 
그러나 도성 안에 거주하는 인구가 점차 증가하여, 성내에 모든 인구를 수용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 즈음부터 성곽으로부터 십 리 바깥까지의 지역을 ‘[[성저십리]]’라 칭하게 되었으며, 성저십리로의 인구 이동도 일어났다. 결국 1461년 2월 27일 성저십리는 공식적으로 한성부에 속하게 되어<ref>《세조실록》 세조 23권 7년 2월 27일, 한성부에서 서울의 오부 밖의 성저 십리를 각 부에 분속시킬 것을 건의하다. [http://sillok.history.go.kr/id/kga_10702027_002 국사편찬위원회] {{웨이백|url=http://sillok.history.go.kr/id/kga_10702027_002 |date=20170320053342 }}</ref>, 한성부의 영역이 확장되었다.
 
== 관청으로서의 한성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