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에타노 도니체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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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Donizetti in colore.jpg|thumb|250px|Gaetano가에타노 Donizetti도니체티]]
'''도메니코 가에타노 마리아 도니체티''' ({{llang|it|Domenico Gaetano Maria Donizetti}}, [[1797년]] [[11월 29일]] [[이탈리아]] [[롬바르디롬바르디아]] [[베르가모]] ~ [[1848년]] [[4월 8일]] [[베르가모]]) 는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이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는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이다. 도니제티는 [[빈첸초 벨리니]], [[로시니]], [[빈첸초 벨리니]]와 함께 19세기 전반 [[벨칸토 오페라]]를오페라를 주도하였다.
 
== 생애 ==
도니체티는 1797년 [[베르가모]]에서 음악과 전혀 상관없는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마을 [[전당포]]의 관리인며, 도니제티는 세 아들 중 막내였다. 그러나 도니체티는 베르가모를 대표하는 [[가톨릭 교회]]의 [[성직자]] 죠반니조반니 시모네 마이르에게서 음악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볼로냐 음악원에서 [[로시니]]의 후배이며, 처음에는 [[로시니]]의 모방에 그치고 있었으나, [[로시니]]가 오페라 창작의 붓을 놓은 뒤부터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아버지의 의향에 반하여 음악가를 지망하였기 때문에 생활을 위해 군에 입대하였고, 군무의 틈을 타 오페라 작곡에 힘썼다. 1823년 25세로 제대, 오페라 작곡가로서 입신하여 이탈리아 각지에서 해마다 새 작품을 발표하여 점차 지위를 굳혔다. [[로시니]] 이상으로 속필이며, [[로시니]]가 <세비야의 이발사>를 쓰는 데 13일간이나 걸렸다니 정말 게으름쟁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 명성 ==
 
1830년대에 들어서 기법은 원숙하여 오페라 부파로는 <사랑의 묘약>(1832), <연대(聯隊)의 딸>(1840), <돈 파스콸레>(1843) 등을 내놓았고 한편 오페라 세리아로는 <루크레치아 보르지아>(1834), <루치아>(1835) 등을 남겼다. [[빈]]이나 [[파리 시|파리]]에서도 활약했지만 1845년경부터 신경성 마비로 고향인 [[베르가모]]로 돌아와 1848년 4월 8일 50세로 세상을 떠났다. 도니체티의 오페라는 명가수가 배출된 시대에 작곡되었기 때문에 성악의 기교를 과시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띄며 그것은 예컨대 <루치아>의 유명한 <광란의 장>에서 전형을 볼 수가 있다. 한편 <사랑의 묘약>에서 보는 바와 같이 유려 감미로운 멜로디의 창작에도 뛰어났다. 어쨌든 도니체티의 궁극적 목적은 가수의 아름다운 소리를 어떻게 발휘하느냐 하는 방법의 탐구에 있었다.
== 작품 ==
 
== 명성작품 ==
도니체티는 75개의 [[오페라]], 16개의 [[교향곡]], 19개의 [[현악 사중주]], 193개의 노래, 45개의 듀엣, 3개의 [[오라토리오]], [[기악]] [[협주곡]], [[소나타]], 기타 [[실내악]]등의 작품을 작곡했다.
=== 주요 오페라 ===
:《[[돈 파스콸레]]》
:*《[[람메르무어의 루치아파스콸레]]》
:*《[[로베르토람메르무어의 데브뢰루치아]]》
:*《[[로베르토 데브뢰]]》
*《[[루크레치아 보르자 (도니체티)|루크레치아 보르자]]》
:*《[[마리아 스투아르다]]》
:*《[[사랑의 묘약]]》
:*《[[안나 볼레나]]》
:*《[[연대의 딸]]》
:*《[[집시 (도니체티)|집시]]》
:*《[[초인종 (도니체티)|초인종]]》
:*《[[폴리우토]]》
:*《[[행운의 속임수]]》
:*《[[라 파보리타]]》
:*《[[리타 (도니체티)|리타]]》
:*《[[마리노 팔리에로]]》
:*《[[사무니의 린다]]》
:*《[[알바 공작(도니체티)|알바 공작]]》
:*《[[엘리자베타 (도니체티)|엘리자베타]]》
 
{{토막글|작곡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