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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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년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 5세기경, 제3차 세계 공의회인 [[에페소 공의회]]에서 [[마리아 (예수의 어머니)|성모 마리아]]는 신성 출산을 했다는 의미의 '[[테오토코스]]'라는 교의가 선포되었다. 이 교리 이후 예수 그리스도가 신성을 지니고 탄생했음을 확인하였고, 기독교의 교리로 공식 선포됨에 따라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묘사한 성화도 교회로부터 정식으로 인준되었다. 6세기부터 [[비잔티움 제국|비잔티움 궁정]]의 공식적인 보호와 후원 아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중심으로 성모 신심이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ref>A. Cameron, "The Theotokos in sixth-century Constantinople", ''Journal of Theological Studies'', New Series '''19''' (1978:79-108).</ref> 하지만 성모 신심이 대중들 사이로 본격적으로 증대하기 시작한 것은 5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이며, 이 시기에 사람들은 성모 마리아의 생애를 다룬 각종 전승들과 유물들에 대하여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로마의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을 비롯하여 [[마리아 (예수의 어머니)|성모 마리아]]에게 봉헌하여 그녀를 주보성인으로 삼은 성당들을 본격적으로 짓기 시작하였다.<ref>John L. Osborne, "Early Medieval Painting in San Clemente, Rome: The Madonna and Child in the Niche" ''Gesta'' '''20'''.2 (1981:299-310) and (note 9) referencing T. Klauser, "Rom under der Kult des Gottesmutter Maria", ''Jahrbuch für der Antike und Christentum'' '''15''' (1972:120-135).</ref> [[교황 세르지오 1세]](687-701)는 최초로 로마 전례력 안에 [[마리아 (예수의 어머니)|성모 마리아]]의 축일을 포함시켰다.<ref>''Liber Pontificalis'', I, 376.</ref>
 
초대 교회의 [[교부]]들은 [[마리아 (예수의 어머니)|마리아]]와 [[하와]]를 대비시켜 “하와의 불순종이 묶어놓은 매듭을 마리아의 순명이 풀어 주었고, 하와가 불신으로 맺어놓은 것을 마리아가 믿음으로 풀었다.”라고 하였으며, 마리아를 ‘새 하와’ 또는 ‘제2의 하와’라고 불렀다.<ref>{{웹 인용 | title = Mary, The New Eve | accessdate = [[2008년]] [[10월 8일]] | url = http://campus.udayton.edu/mary//meditations/neweve.html |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081203170350/http://campus.udayton.edu/mary//meditations/neweve.html | 보존날짜 = 2008-12-03 | 깨진링크url-status = dead }}</ref> 즉 하와는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으로 세상에 죽음과 불행을 가져왔으나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생명의 원천인 그리스도를 낳고, 마침내 세상에 구원과 축복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교회 대분열 이후 서부 유럽의 서방교회에서 중세 시대에 접어들면서 성모 신심은 [[시리아의 성 에프렘]],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 등 성모 신심가들의 영향을 받아 더욱 성장하여 한 차원 크게 발전하였다. [[성모송]]과 같이 마리아의 전구를 청하는 기도문들이 생겨나고, 수도원 등지에서 [[아베 마리아]], [[살베 레지나]] 등의 마리아를 찬미하는 성격을 띤 단선율 성가가 작사 작곡되었다. 그리하여 성모 신심 행위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여 대중 사회에 굳건하게 자리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