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선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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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1616년(광해군 8) 성균관유생으로서 [[이이첨]]의 정치를 난정(亂政)으로 규정하고, 이와 함께 [[박승종]](朴承宗)·[[유희분]](柳希奮) 등의 망군(忘君)의 죄를 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사간원]] 등 3사에서 탄핵이 빗발쳤고 [[1617년]] 유배를 당해, [[함경북도]] [[경원군|경원]](慶源)으로 유배, 이후 경원과 [[경상남도]] [[기장군|기장]](機張) 등지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ref name="youn2007"/> 이를 병진소(丙辰疏)라 한다.
 
{{인용문|폐행신(嬖幸臣) 이이첨(李爾瞻)이 국정을 제멋대로 하며 의정(議政) 박승종(朴承宗)과 왕후의 오빠 유희분(柳希奮)이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 버렸다.<ref>{{웹 인용 |url=http://yungosan.hosting.paran.com/zbxe/?mid=sg2_3 |제목=보관 된 사본 |확인날짜=2011-06-01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0306052457/http://yungosan.hosting.paran.com/zbxe/?mid=sg2_3# |보존날짜=2016-03-06 |깨진링크url-status=dead }}</ref>}}
 
이때 유생인 이형(李瑩)이 그를 두둔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어 평소 이이첨과 친분이 있던 그의 양아버지 [[윤유기]]에게도 귀양을 보내라는 여론이 나타났으나 삭탈관직하고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선에서 끝났다. 이후 그는 관직을 단념하고 학문연구에 치중했다. [[1617년]] 1월 절도유배의 형이 내려진 뒤 압송되었으나 다시 유배되었다. 1617년 한 해 동안 양사로부터 그에게 죄를 주어야 된다는 탄핵상소가 계속 조정에 올려졌다. 그러나 아버지 [[윤유기]]나 생부 [[윤유심]]이 [[북인]]의 당원이었던 덕에 죽음은 모면할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