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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은 [[1689년]]([[조선 숙종|숙종]] 15)에 서인의 요청을 묵살하고 원자의 명호(名號)를 정하고 장소의를 희빈으로 책봉하였다. [[송시열]]은 상소를 하여 [[송나라]] [[북송 신종|신종]]이 28세에 [[북송 철종|철종]]을 낳았으나 후궁의 아들이라 하여 번왕(藩王)에 책봉하였다가 적자가 없이 죽음에 태자로 책봉되어 신종의 뒤를 계승하였던 예를 들어 원자 책봉의 시기가 아님을 주장하였다.
 
기사환국이 단행된 지 4개월 만에 숙종은 서인계 왕비인 인현왕후 민씨를 폐출하고 부모의 봉작을 빼앗았다. 이에 대해 서인 노론측은 [[오두인]] 등 86인의 이름으로 상소를 올렸지만, 오두인, [[박태보]], [[이세화]] 등은 국문당하여 위리안치 되거나 귀양을 갔으며, 오두인과 박태보는 국문 끝에 사망했다. 1690년 10월 22일 원자가 세자가 되면서, 장씨를 희빈에서 왕비로 승격시켰다. 같은 해 6월 송시열은 유배됐다가 사사되고 말았다.<ref>{{웹 인용|url=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09|제목=한국사 콘텐츠|언어=ko|확인날짜=2018-05-13|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80514064627/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09|보존날짜=2018-05-14|깨진링크url-status=dead}}</ref>
 
이 사건 후 남인 [[권대운]] 등이 등용되었다. 이후 [[갑술옥사]] 때까지 남인이 정권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