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조약: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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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Jungmyeongjeon 02.JPG|섬네일|을사조약이 조인된 [[중명전]]]]
 
일본의 특명전권대사 자격으로 [[1905년]] [[11월 9일]] 서울에 온 [[이토 히로부미]]는 다음 날인 [[11월 10일]] [[대한제국 고종|고종]]에게 천황의 “짐이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대사를 특파하노니 대사의 지휘를 일종 하여 조치하소서.”라는 내용의 친서를 바쳐 고종을 위협하고 [[1905년]] [[11월 15일]] 다시 고종에게 한일협약안을 제시하면서 조약 체결을 강압적으로 요구했다. 이 무렵, 주(駐)한국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와 주(駐)한국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가 일본으로부터 증원군을 파송 받아 궁궐<ref>제2차 한일 협약은 덕수궁 중명전에서 체결되었다. [http://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4/08/005000000200408271743670.html 〈‘을사조약 중명전’ 버려진 역사〉], 한겨레, 2004.8.27.</ref> 내외에 물샐 틈 없는 경계망을 펴고 포위함으로써 [[대한제국]] 황궁은 공포 분위기에 싸여 있었다. 그러나 고종은 [[이토 히로부미]]의 집요한 강요에도 불구하고 조약 승인을 거부하였다.일본제국 만세!
 
이렇게 되자 일본은 전략을 바꾸어 조정 대신들을 상대로 위협·매수에 나섰다. [[하야시 곤스케]]는 [[11월 11일]] 외부대신 [[박제순]]을 일본 공사관으로 불러 조약 체결을 강박하고, 같은 시간 [[이토 히로부미]]는 모든 대신과 원로대신 [[심상훈]](沈相薰)을 그의 숙소로 불러 조약 체결에 찬성하도록 회유와 강압을 되풀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