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호아이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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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6월 초 부에가 통킹에 도착할 무렵, 프랑스의 지위는 매우 위태로웠다. 프랑스는 [[하노이]], [[하이퐁]], [[남딘]]에 소규모 수비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혼가이]]와 [[안남]]의 [[꾸이년]]에서 고립된 초소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유영복의 흑기군과 베트남 왕자 호앙께비엠이 이끄는 베트남군에 대한 공세는 생각하기도 힘들었다.<ref>Duboc, 139–51; Huard, 83–4; ; Thomazi, ''Histoire militaire'', 59–60</ref> 6월에 프랑스군은 수비군의 배후를 쳐서, 하노이와 남딘의 사기가 떨어진 베트남군을 물리쳤다.<ref>Huard, 84–8</ref> [[프랑스]]와 [[뉴칼레도니아]]에서 증원군이 조기에 도착했고, 코친차이나의 징병군과 베트남인 치중대는 부에가 골칫거리들에게 반격을 가할 수 있는 기반이 되어 주었다. 7월 19일, 남딘의 프랑스군 선임 지휘관 피에르 드 바당스 대대장이 호앙께비엠 왕자가 이끄는 포위를 하고 있던 베트남 군대를 공격하여 격파해서 남딘에 대한 베트남의 압박을 효과적으로 완화시켰다.<ref>Duboc, 156–7; Huard, 88–92; Nicolas, 262–4</ref>
 
[[1883년]] 7월, 아메데 쿠르베 제독이 상당수의 증원군을 이끌고 알롱만에 도착하면서, 통킹에 있는 프랑스군의 입지가 더욱 강화되었다. 프랑스는 현재 유영복에 대한 공격을 고려할 입장이었지만, 그들은 흑기군에 대한 군사 행동을 하려면 후에의 베트남 조정과의 정치적 합의가 수반되어야 함을 깨달았다. 필요하다면, 강요를 해서라도, 통킹의 프랑스 보호령을 인정받아야 했다. 1883년 7월 30일, 쿠르베 제독, 부에 장군 그리고 근자에 통킹의 민간 치안총감으로 임명된 쥘 아르망은 하이퐁에서 전쟁 협의회를 개최했다. 세 사람은 부에 장군이 다이강변의 푸호아이 주변에서 가능한 빨리 흑기군을 공격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그들은 또한 후에 조정이 유영복의 흑기군을 은밀히 돕고 있으며, 호앙 왕자는 여전히 남딘에서 프랑스에 적대해 무장을 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 그들은 프랑스 정부로 하여금 후에의 베트남군에게 최후통첩을 해서 베트남이 통킹을 프랑스 보호령으로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즉각적인 공격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하게 했다. 프랑스 해군은 이 제안을 8월 11일 승인했다. 8월 20일, 투언안의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후에강 어귀의 방어진 요새를 강습해, 그들이 다른 선택을 할 경우 후에를 직접 공격하려 했다.<ref>Huard, 103–22; Nicolas, 280–5; Thomazi, ''Conquête'', 165–6; ''Histoire militaire'', 62–4</ref>
 
베트남 조정은 휴전을 요청했고, 8월 25일 아르망은 이후 후에 조약이라고 불리는 내용을 베트남 조정에 내놓았다. 베트남 조정은 프랑스가 코친차이나 점령의 정당성을 인정해야 했고, 안남과 통킹을 프랑스 보호령으로 수용하여 통킹에서 군대를 철수하기로 약속했다. 베트남 왕실과 조정은 살아남았지만, 프랑스의 지시를 받아야 했다.<ref>Huard, 122–30; Thomazi, ''Conquête'', 166</ref>
{{미완성 문단}}
 
아르망과 쿠르베가 후에에서[[후에]]에서 프랑스 보호령을 수행하고 있는 동안, 부에 장군은 7월 30일 하이퐁 회의에서 해결된합의된 프로그램내용 중 자신의 수행해야 할 역할을 수행하려하려 했다. 1883년 8월 15일, 부에는부에 유영복의 흑기군을장군은 [[다이강]] 앞의앞에 강력한 방어 진지에서진지를 구축해 놓은 유영복의 흑기군을 공격했다.
 
==병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