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촌-태릉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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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창동]] 전선에서 [[최창언]] 중령이 이끄는 제5연대와 유의준 중령이 이끄는 제16연대 1대대의 300여명이 이날 19:00에 사관학교 부근으로 철수하였으나, 이들은 동일 23:00 학교지역을 떠난다.
 
* 이때 이준식 준장은 생도대대와 제 9연대로서 이 지역의 방어에 임하던 중이었고, 진전에서의 접촉은 따로 없었다.
* 정면에 투입된 것으로 알려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군 제3사단은 [[서울]] 침공을 하려 했지만 이들의 진출속도는 더뎠다.
 
정면에 투입된 것으로 알려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군 제3사단은 [[서울]] 침공을 하려 했지만 이들의 진출속도는 더뎠다. 이들 정면에는 기계화부대를 기동할 수 있을 정도로 좋은 도로망이 없었고, 내리 전투에서 생도대대로부터 받은 피해가 컸기 때문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군 제 3사단은28일 서울 동북교의 중랑 천변까지 진출했으며, 이날 05:00부터는 태릉 이역에 포격을 가하면서 08:00에는 1개 소대 병력으로 정찰 시도했다. 이를 확인한 이준식 준장은 부교장 [[이한림]]과 제9연대장 [[윤춘근]] 중령등 3자회의를 갖고 앞으로의 대책을 협의했다. 협의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 이들 정면에는 기계화부대를 기동할 수 있을 정도로 좋은 도로망이 없었던 것
 
- 내리 전투에서 생도대대로부터 받은 피해가 컸던 것
 
* 28일 서울 동북교의 중랑 천변까지 진출했으며, 이날 05:00부터는 태릉 이역에 포격을 가하면서 08:00에는 1개 소대 병력으로 정찰 시도했다.
* 이를 확인한 이준식 준장은 부교장 [[이한림]]과 제9연대장 [[윤춘근]] 중령등 3자회의를 갖고 앞으로의 대책을 협의했다. 협의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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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릉 저지선의 붕괴 이후 생도대대의 상황이동 ===
6월 27일 12:00 육군본대와 통신이 두절되었다.
 
* 학교본부는 총참모장의 명령에 따라 다른 재경부대와 같이 시흥보병학교로 철수했기 때문에 전투부대만이 남아 있었으며 병력운송용 차량은 전혀 없었다. 28일 학교본부는 10:00 철수명령을 수령했다. 그러나 최전방에 있는 F고지에 비치된 제2중대에는 철수명령이 12:00에 전달되었으며 각개 생도들에게까지는 14:00가 지나서야 철수명령이 전달되었다. 따라서 먼저 전달을 받은 중대와 늦게 받은 중대사이에는 철수개시에 많은 차이가 있었고, 생도대대가 철수할 무렵부터는 북한군의 포격때문에 부대행동을 취할 겨를도 없었고 철수경로나 집결지도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학교 교정으로 향하여 각개 약진하였다.
 
* 28일 10:00 철수명령을 수령했다. -최전방인 F고지에 비치된 제2중대에는 철수명령이 12:00에 전달되었으며 각개 생도들에게까지는 14:00가 지나서였다.
* 일차적으로 학교 교정에 집결한 150명은 부대대장 [[손관도]] 소령 지휘하에 [[광장동]]으로 철수하여 먼저 철수한 교장과 본부요원을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본부요원과 대대장이 함께 이동중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군의 급습을 받게되고, 그 이후에 대대장의 행방은 묘연해졌다.
 
먼저 철수한 생도들은 광장동에서 28일 17:00까지 [[한강]]을 도강할 수 있었으나, 늦게 철수한 생도들은 교문에서 적을 만나 사격을 받았고, [[봉화산]](학교 서남쪽 1km)에서는 기관총 위협 사격때문에 흩어져서 서울로 또는 광장동으로 철수해서 본대에 합세하기도 하였다. 대대는 여기에서 100명의 손실을 보았는데, 제1기생 [[한정석]] 생도 등 11명의 사망을 확인하였을 뿐, 제2기생은 입교한지 불과 3주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누가, 언제, 어디서 전사 또는 실종하였는지 알 수 없었다. 철수명령을 받지 못한 생도들도 상당수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중 생도 및 [[병사 (군인 계급)|병사]]<ref>[[대한민국 국군]]에서는 사병이란 단어 대신 이들을 구별하여 부른다.</ref> 20명은 철수하기로 결정하고 [[불암산]]으로 잠입하여 [[석천암]], [[불암사]] 등을 근거지로 한 유격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불암사]] 주지 [[윤용문]]과 [[불암동]]의 주민 [[박태흥]], [[임용문]] 등은 이들에게 은신처와 식사, 정보 등을 제공하여 적극 지원하고, 이 부대를 「호랑이 부대」라고 불렀다.
 
29일 14:00에 제9연대장 [[윤춘근]] 중령이 지휘하는 제9연대 1대대는 생도대대가 철수한 것을 확인하고 철수하였다. 대대장 유 소령은 제1중대를 엄호부대로 하여 현 위치에서 대대의 철수를 엄호하게 했는데, 사관학교 지역에 적 포격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철수로를 E고지-391번도로-망우리-용마봉-광장동으로 예정했다. E고지에서는 [[윤병준]] 중위가 이끄는 제2중대로 하여금 제 1중대의 철수를 엄호하는 동시에 [[최춘삼]] 중위가 이끄는 제3중대로서는 구릉산(망우리 북쪽 1.5km)을 확보케 하여 질서있는 철수를 하게 하였다. 철수하는 도중 분, 소대 규모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군과 수차례 마주쳤지만 그때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군이 퇴각하였기 때문에 교전상황은 따로 없었다. 그러나 E고지를 지날 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포격으로 [[장원순]], [[금강석]] 양 중위를 포함하여 5명의 전사자와 20명의 사상자가 났다. 17:00에 대대는 광장동으로 철수했고, 생도대대를 엄호한 후 동일 22:00에 한강을 건넜다.
 
제5연대의 연대장 [[최창언]] 중령과 [[차갑준]] 소령은 『한강 남쪽으로 철수하여 전세를 관망한 다음 대처하도록 하자.』고 주장하지만 제16연대 1대대장 [[유의준]] 중령은『서울로 가서 본대와 합세하여 싸우는 것이 옳다.』라고 주장한다.결국 유 중령은 서울로 떠났고, 최 중령은 다음 날 23:00 광장동으로 출발했다. [[6월 28일]] 05:00, 제5연대는 광장동에 도착했지만 광진교는 이미 폭파된 뒤였다.최 중령은 유 중령의 판단이 옳았음을 깨닫고 강변을 따라 지금의 경마장 부근까지 갔을 때 서울로 간다던 유 중령이 뛰어 오면서『서울은 완전 점령당하였다.』고 한다. 이에 그들은 다시 광장동으로 돌아간다. 이때가 08:00였는데 거기에는 피난민들이 몰려들어 3척의 배를 놓고 서로 먼저 타려고 아우성을 이루고 있는 현상이었다. 최 중령은 피난민들에게『군인이 먼저 건너야 반격을 할 수 있지 않느냐?』고 타일러, 이 배로써 병력을 다 이동시키고, 피난민까지도 군인 통제하에서 강을 건넌 후 이준식 준장이 지휘하는 생도대대에 배를 인계하였다.
- 최전방인 F고지에 비치된 제2중대에는 철수명령이 12:00에 전달되었으며 각개 생도들에게까지는 14:00가 지나서였다.
 
* 따라서 먼저 전달을 받은 중대와 늦게 받은 중대사이에는 철수개시에 많은 차이가 있었고, 생도대대가 철수할 무렵부터는 북한군의 포격때문에 부대행동을 취할 겨를도 없었고 철수경로나 집결지도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학교 교정으로 향하여 각개 약진하였다.
* 일차적으로 집결한 150명은 부대대장 [[손관도]] 소령 지휘하에 [[광장동]]으로 철수하여 먼저 철수한 교장과 본부요원을 만나게 되었다.
* 그러나 본부요원과 대대장이 함께 이동중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군의 급습을 받게되고, 그 이후에 대대장의 행방은 묘연해졌다.
* 먼저 철수한 생도들은 광장동에서 이날 17:00까지 [[한강]]을 도강할 수 있었으나, 늦게 철수한 생도들은 교문에서 적을 만나 사격을 받았고, [[봉화산]](학교 서남쪽 1km)에서는 기관총 위협 사격때문에 흩어져서 서울로 또는 광장동으로 철수해서 본대에 합세하기도 하였다.
* 대대는 여기에서 100명의 손실을 보았는데, 제1기생 [[한정석]] 생도 등 11명의 사망을 확인하였을 뿐, 제2기생은 입교한지 불과 3주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누가, 언제, 어디서 전사 또는 실종하였는지 알 수 없었다.
* 철수명령을 받지 못한 생도들도 상당수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중 생도 및 [[병사 (군인 계급)|병사]]<ref>[[대한민국 국군]]에서는 사병이란 단어 대신 이들을 구별하여 부른다.</ref> 20명은 철수하기로 결정하고 [[불암산]]으로 잠입하여 [[석천암]], [[불암사]] 등을 근거지로 한 유격활동을 전개하였다.
* 이때 [[불암사]] 주지 [[윤용문]]과 [[불암동]]의 주민 [[박태흥]], [[임용문]] 등은 이들에게 은신처와 식사, 정보 등을 제공하여 적극 지원하고, 이 부대를 「호랑이 부대」라고 불렀다.
* 14:00에 제9연대장 [[윤춘근]] 중령이 지휘하는 제9연대 1대대는 생도대대가 철수한 것을 확인하고 철수하였다.
* 대대장 유 소령은 제1중대를 엄호부대로 하여 현 위치에서 대대의 철수를 엄호하게 했는데, 사관학교 지역에 적 포격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철수로를 E고지-391번도로-망우리-용마봉-광장동으로 예정했다.
* E고지에서는 [[윤병준]] 중위가 이끄는 제2중대로 하여금 제 1중대의 철수를 엄호하는 동시에 [[최춘삼]] 중위가 이끄는 제3중대로서는 구릉산(망우리 북쪽 1.5km)을 확보케 하여 질서있는 철수를 하게 하였다.
* 철수하는 도중 분, 소대 규모의 적과 수차례 마주쳤지만 그때마다 그들이 퇴각하였기 때문에 교전상황은 따로 없었다.
* 그러나 E고지를 지날 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포탄으로 [[장원순]], [[금강석]] 양 중위를 포함하여 5명의 전사자와 20명의 사상자가 났다.
* 17:00 대대는 광장동으로 철수했고, 생도대대를 엄호한 후 동일 22:00에 한강을 건넜다.
* 제5연대의 연대장 [[최창언]] 중령과 [[차갑준]] 소령은 『한강 남쪽으로 철수하여 전세를 관망한 다음 대처하도록 하자.』고 주장하지만 제16연대 1대대장 [[유의준]] 중령은『서울로 가서 본대와 합세하여 싸우는 것이 옳다.』라고 주장한다.
* 결국 유 중령은 서울로 떠났고, 최 중령은 다음 날 23:00 광장동으로 출발했다.
* [[6월 28일]] 05:00 제5연대는 광장동에 도착했지만 광진교는 이미 폭파된 뒤였다.
* 최 중령은 유 중령의 판단이 옳았음을 깨닫고 강변을 따라 지금의 경마장 부근까지 갔을 때 서울로 간다던 유 중령이 뛰어 오면서『서울은 완전 점령당하였다.』고 한다. 이에 그들은 다시 광장동으로 돌아간다.
* 이때가 08:00였는데 거기에는 피난민들이 몰려들어 3척의 배를 놓고 서로 먼저 타려고 아우성을 이루고 있는 현상이었다. 최 중령은 피난민들에게『군인이 먼저 건너야 반격을 할 수 있지 않느냐?』고 타일러, 이 배로써 병력을 다 이동시키고, 피난민까지도 군인 통제하에서 강을 건넌 후 이준식 준장이 지휘하는 생도대대에 배를 인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