톈진 협약: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잔글 →‎top
41번째 줄:
이론상, 톈진 협약으로 통킹에서의 프랑스와 청나라 사이의 갈등은 결론이 났다. 그러나 푸르니에는 전문 외교관이 아니었으며, 계약에는 여러 가지 결말이 있었다. 결정적으로, 청나라 군대가 통킹에서 철수하는데 필요한 기한을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프랑스는 즉각 병력 철수를 해야한다고 주장한 반면, 청나라는 철수는 포괄적 조약의 결론에 따라 결정되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청나라의 입장은 협정 이후의 조건을 적용할 의사가 없거나, 무능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후 합리화였다. 이 협정은 청나라 내부에서 큰 발발을 샀다. 강경파들은 리홍장의 탄핵을 요구했고, 그의 정적들은 통킹의 청나라군에게 위치를 지키고 있어라는 명령에 흥미를 느꼈다.
 
1884년 6월 23일, 박러박레 근처에서 프랑스군과 청나라군 사이에 일어난 유혈 충돌로 양국은 새로운 위기에 빠졌다. 박러 매복 작전에 대한 배상금을 거부한 청나라의 태도는 [[1884년]] [[8월 23일]]에 [[청불 전쟁]]의 발발로 이어졌다.
 
== 같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