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 해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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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에는 "화전(火戰)”이라는 문구가 없고 “화살을 비오듯 쏘아대니”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난중잡록과 선묘중흥지, 그리고 해남 [[명량대첩비]]에서는 화전(火戰)임을 알게 해준다. 난중일기에는 화전(火戰)에 관한 기록이 빠져있다. 따라서 난중일기는 반쪽짜리 해전 기록으로 봐야 한다. 이렇게 된 이유는 조선 수군이 두패로 나누어서 각기 다른 작전을 수행하였기에 발생한 문제이다. 따라서 난중잡록도 반쪽짜리 해전 기록에 해당되지만 선묘중흥지는 이것을 보충하고 있다.<ref>난중일기-이순신/해남명량대첩비-홍문관 대제학 김만중, 예조판서 이민서,판돈녕 부사 이정영/난중잡록-의병장 조경남/선묘중흥지(선조:1587~1607) ,2019년에 문서를 토대로 확인</ref></p>
또한 이분의 행록에도 해전 경과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찾을수 있다. 행록에는 피란민들이 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해전을 살펴본 기록이 있는데 "얼마있다 다시보니 적선이 차츰 물러 가는데"라는 글귀는 난중일기의 기록처럼 조선 수군이 적선 30여척을 부수고 마다시를 참수하여 효수했을때 일본군이 뒤로 물러남을 암시한다. 그리고 통제사의 대장선이 바다 복판에 있는것을 보자 일본군은 다시 패를 갈라서 번차례로 총공격을 하게 되고 하루종일 전투를 치루었으며 결국 대패하여 퇴각함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조선 수군과 일본군은 하루종일 싸웠는데 초반에 한차례 격돌하고 중반부터 다시 격돌하여 일본군은 크게 대패하였으므로 난중일기에 기록된 30여척(초반 전투)보다 훨씬 많은 전함을 잃은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초반전투에서 마다시가 사살되고 후반전투에서는 내도수(구루시마 미치후사)가 사살되자 일본군의 사기는 완전히 떨어지고 말았다.<br>
[[파일:임하도해역비디오.webm|섬네일|임하도해역영상입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군감 [[모리 다카마사]](모리민부)는 바다에 빠졌다가 구조되었고 일본군 사령관 [[도도다카토라]](藤堂高虎)는 부상을 당했다. 임하도의 좁은 수로에서 막힌 일본 수군의 피해는 매우 컸다 할 수 있다. 또한 해상에서 싸우던 일본 수군 중 [[도도다카토라]](藤堂高虎)등 일부가 도주에 성공하였으며 일본 수군은 유시(酉時 오후 5시~7시) 무렵, 물살이 느려지고 바람이 [[일본]] 수군쪽으로 부는 것을 이용, 퇴각하였다.또한 조선 수군은 해전후 당사도(唐沙島)로 퇴각하여 이튿날 어외도(무안군 지도읍)에서 피난민들과 합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