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6번째 줄:
4차례나 [[일제]]의 [[총리]]를 지낸 정치가 [[이토 히로부미]]는 [[1905년]] [[대한제국]]과 [[을사늑약]]을 맺는 데에도 크게 역할했다. 그가 [[만주]]를 방문하여 러시아와 회담을 갖는다는 소식을 대동공보사에서 전해들은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 처단에 자원했다. 만주의 [[독립 운동가]]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유승렬]], [[김성화]], [[탁공규]]는 7인 동맹을 맺고 처단을 계획했다.
 
10월 21일에 대동공보사 기자 이강(李剛)의 지원을 받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안중근은 [[우덕순]]과 [[조도선]], [[유동하]]와 함께 [[하얼빈]]에 도착했다. 당초 계획은 동청철도(東淸鐵道)의 출발지인 [[장춘]]의 남장춘(南長春), 관성자(寬城子)역과 도착지인 하얼빈, 채가구(蔡家溝)역의 4개 지점에서 암살을 시도하려 하였으나 자금과 인력이 부족하여 도착지인 하얼빈과 채가구에서 저격하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그러나 채가구역에서의 계획은 이를 수상하게 여긴 러시아 경비병에 의해 취되었다
 
소되었다 당국은 이토 일행의 안전을 위해 하얼빈 역 현장을 엄격히 통제할 예정이었지만 일본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가 ‘많은 일본인들이 역 앞에서 이토 일행을 환영할 수 있도록 허용해 달라’고 요청해 경호를 강화하지 않았다.<ref>노창현, [http://m.zum.com/news/home/12087167 ‘한국의 복수, 이토 히로부미 죽였다’ NYT 105년 전 대서특필], 뉴시스</ref>
 
== 사건 과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