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삼국통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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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삼국통일'''이란 [[신라]]가 [[당나라]]와 동맹을 맺고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킨 후 [[당나라]] 군대를당군을 [[대동강]] 북쪽으로 축출하여 [[676년]]에 한반도 중남부를한반도를 통합한 일을 말한다. 고구려 영토의 북부 및북부였던 [[만주]] 일대로는 진출하지 못하여 영토 및 인구 구성적으로 삼국의 완전한 통일을 달성하지는 못하였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지만, 삼국을 하나로 통합하고 [[나당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외세를 축출한 점에서 의의가 크다.
 
신라가 차지하지 못한 [[만주]]의 고구려 옛 영토에는 30여년의 공백기를 거친 뒤 [[발해]]([[698년]] ~ [[926년]])가 들어섰다. 신라와 발해가 공존한 시기를 [[남북국 시대]]라고 부른다. 이 때문에 [[한민족]] 최초의 통일 국가는 [[신라]]가 아니라 [[고려]]이며, 신라의 '삼국 통일' 대신대신에, 신라의 '한반도 중남부 통합' 또는 '원삼국 해체기' 등으로 고쳐 불러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고려도 고구려 북부나 발해 영토와 인구는 신라와 마찬가지로 통합하지 못했기 때문에 북부 영토의 불완전성을 근거로 신라는 불완전 통합이고 고려는 완전한 통합이라고 달리 볼 수는 없다.
 
또한 신라의 삼국 통일은 외세를 끌여들였다는 점에서 20세기 민족주의에 기반한 민족사학자를 중심으로 비판을 받아 왔다. 하지만 [[한반도]] 내에서 민족의 정체성은 [[고려]] 이후에 완성되었으며, [[한반도]] 내에서 민족 국가의 정체성은 [[고려]]로부터 출발하여 [[조선]]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생긴 것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따라서 시대상을 고려할 때 이러한 비판은 학계 주류로는 아직 인정되지 않고 있다.
 
== 배경 ==
신라는 [[6세기]] [[법흥왕]] 때에 이르러 율령(律令)과 관제를 반포하고, [[이차돈]]의 순교를 거쳐 [[불교]]를 국교로 정한 이후 불교정신을 바탕으로 내부의 결속을 다지며 통치 체제를 정비하고 국력강화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였다마련하여 국력이 강해졌다. 이 시기에 신라는 [[금관가야]]를 흡수하였고통합하였고, 국호를 사로국, 서라벌에서 덕업을 일신하고 사방에 망라한다는 뜻의 '신라(新羅)'로 개칭하였다.
 
법흥왕의 뒤를 이은 [[진흥왕]]은 국가 발전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고,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 백성의 사상적 통합을 도모하였다. [[진흥왕]]은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백제 성왕|성왕]]을 전사시킴으로써 한강 유역의 패권을 완전히 장악하였고, 가야 연맹 중 마지막으로 남은 [[대가야]]를 완전히 정복하여 남서쪽으로는 [[낙동강]] 서쪽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동북쪽으로는 [[함경남도]], 북서쪽으로는 [[황해도]] 지역까지 영토를 크게 확장시켰다.
 
[[진흥왕]] 집권 이후 신라는 고구려, 백제와의 삼국 간 항쟁을 주도하기주도할 시작했고만큼 강국이 되었고, 고구려가 [[당나라]]의 침략을 막아내던 기간에는 [[진골]]에 속하는 왕족인 [[김춘추]]가 [[가야]]계 세력의 필두인 [[김유신]]과 제휴하여함께 권력을신흥 장악한 후에세력으로서 집권 체제를 강화하였다강화하며 국가의 내부 결속을 다졌다.
 
== 전개 과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