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광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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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광제 주유숭은 신종(神宗) [[만력제]]의 손자이자 복공왕(福恭王) [[주상순]]의 차남이며 [[숭정제]]의 사촌형이었다. 아버지 [[주상순]]은 [[만력제]]의 서자였으나 그를 총애하던 [[만력제]]는 [[태창제]]를 제치고 주상순을 황태자로 세우려 했으나 실패했다. [[주상순]]은 뒤에 복왕에 책봉되었으나 [[1641년]] [[이자성]]의 농민군이 영지인 [[뤄양|낙양]](洛陽)에 쳐들어왔을 때 무방비로 있다가 살해되었다. 주유숭은 어머니 추씨와 함께 극적으로 피신하여 목숨을 건질수 있었다.
그는 명나라가 망하자 명나라의 부흥을 선언하고, 남쪽으로 가서 남명을 세웠다. 그러나 정치적인 능력은 감국겸 시중(監國兼侍中)으로 추대된 노왕(魯王)이나 계왕(桂王)보다도 무능했는데, 단지 황족 생존자 중 서열이 높고 연령이 고령이라는 점이 감안되어 부흥군은 그를 황제로 인정한 것이다. 이어 [[숭정제]]에게 의종(毅宗)이라 시호를 추서하고 숭정제의
그러나 부흥군은 그를 [[유비]](劉備)의 아들 후주(後主) 유선(劉禪)과 비슷하게 취급하고 무시했다고 한다. [[명나라]]를 멸망으로 몰고 간 [[동림당]](東林黨)은 황제와 훈신들 탓만 하였으나 홍광제는 피난조정에서조차 당쟁을 일삼는 [[동림당]]원들 역시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1645년 청나라 정벌군과의 교전 중 패주하다 [[청나라]]로 투항한 황득공의 부하 장군 전유승(田維乘)과 마득공(馬得功)에게 체포되어 연경으로 압송, 모반죄로 감금되었다가 [[1646년]] [[5월 23일]] 참수되었다. 정달(鄭達)의 《야사무문(野史無文)》에 의하면 '전유승과 마득공은 그를 통나무에 묶어서 끌고갔는데 그는 울면서 살려줄 것을 호소하였으나 무시당하였다. 화가 난 그는 전웅의 목을 깨물어서 피가 흘렀으나 무용지물이었다' 한다. 그의 사후 연락이 두절되어 각지에 흩어진 [[명나라]] 부흥군은 두 명의 황제가 난립하는 등 혼란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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