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랑호 납북 사건"의 두 판 사이의 차이

 
 
== 개요 ==
1958년 2월 16일 부산발 서울행 [[대한국민항공|대한국민항공사]] 소속 창랑호(당시 기종 : [[더글러스 DC-3]], 등록부호:HL106) 여객기는 기장 윌리스 P. 홉스와 부기장 멕클레렌 미 [[공군]] 중령이 조종을 하였으며, 승객 29명(성인 28명과 어린이 1명)<ref>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1999072420000201</ref>과 승무원 3명 및 미군 군사고문단원 중령 1명(비공식승무원) 등 34명을 태우고 오전 11시 30분 이륙한 후, [[경기도]] [[평택군]] (현 [[평택시]]) 상공에서 납치되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직할시]]에 있는 [[평양 순안 국제공항]]에 강제 착륙 당하였다. 특히 승객 중에는 창랑호 기장인 홉스 등 미국인 2명과 독일인인 요한 리트히스 부부 등 외국인 4명이 포함돼 있어서 주한 미국대사관과 독일대사관이 승객송환을 위해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다.<ref>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1999072420000201</ref>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언론기관을 통하여 "대한국민항공사가 '의거월북' (자신의 의지로 군사분계선을 넘음) 했다"고 거짓 발표하였다.
창랑호의 기체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납북된 이후 반환되지 않아 대한국민항공사는 운행상의 커다란 타격을 받아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골치를 썩이게 된다. 당시 대한국민항공사는 만송호, '''창랑호''', 우남호. 이렇게 3대의 항공기로 운영을 하고 있었는데 창랑호가 납북당하기 전에 이미 [[1957년]] [[7월 7일]]에 만송호가 [[부산]] 수영비행장에 착륙하던 도중 기체가 크게 파손되어 전손처리된 상황에서 창랑호마저 납북으로 잃게 되어 우남호 하나만으로 항공사를 운영해야만 했기 때문에 적자는 어쩔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대한국민항공사는 결국 [[1959년]] [[4월 22일]]에 큰 돈을 들여 DC-3기 1대를 추가 도입하여 그날로 국내선에 투입하였고 [[1959년]] [[7월 28일]]에는 미국 록히드사에서 콘스틀레이션 749A 4발 여객기 1대를 임차하여 국내선과 국제선에 병용 취항하여 도입 20여일만에 50명의 유학생을 태우고 태평양을 횡단, 서울 ― 시애틀간을 부정기 운항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국민항공사는[[대한국민항공|대한국민항공사]]는 만송호의 전손처리와 창랑호의 납북으로 인해 발생한 적자를 끝내 해소하지 못하는 바람에 [[1961년]] [[7월 16일]]에 대한국민항공사의[[대한국민항공|대한국민항공사]]의 창업주이자 사장인 신용욱 대표가 한강에 투신자살을 하였으며 결국 대한국민항공사는[[대한국민항공|대한국민항공사]]는 [[1961년]] [[11월 13일]] 폐업처리 되었다.
 
== 관련 인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