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 필암서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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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필암서원|필암]](筆巖)이라 지은 것은 그의 고향 맥동 마을 입구에 '붓처럼 생긴 바위'가 있기 때문이라 하며, 바위에는 병계 [[윤봉구]]의 글씨인 『筆巖』이 각자되어 있다.<ref>이 바위의 기운을 받아 하서 [[김인후]]가 태어났다고 한다.</ref>
[[1786년]](정조 10) 제자이자 사위인 고암(鼓巖) 양자징(梁子澂)을 추배(追配) 하였다.<ref>전라도 진사 이경집(李敬緝) 등이 상언(上言)하였다
[[1975년]] 서원의 건물, 유물, 제향 등의 보존과 관리를 위해 건물과 부지는 [[대한민국의 사적|국가사적]] 제242호에 지정되고, [[필암서원 문적 일괄]]은 [[대한민국의 보물|보물]] 제587호로 지정되었다.<ref>서원의 『노비보』, 역대 원장들을 기록한 『원장 선생안』, 학생들의 수업을 담당한 교관, 강의에 참석한 인물의 명단 등을 기록한 『보강안』, 강회 참가자의 명단인 『문계안』, 필암서원 소속 유생들의 명단인 『서재유안서』, 필암서원의 재산을 기록한 『필암서원 원적』, 장성부사가 필암서원에 내려준 『장성부사 하첩』등이다.</ref> 또 [[장성 필암서원 하서선생문집목판|하서 선생 문집]] 650여매와 [[장성 필암서원 하서유묵목판일괄|하서 유묵 목판]] 56판은 [[1999년]] 지방유형문화재 제215호와 제216호에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ref>1568년(선조 1) 새긴 『백련초해』 13판과 『유묵』 4판, 그리고 인종이 김인후에게 하사한 《묵죽도판》 3판으로 1568년(선조 1)과 1770년(영조 46)에 새긴 것과 1610년(광해군 2년)에 새긴 『초서천자문』 18판과 『해자무이구곡』 18판이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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