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융: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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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설명=
|출생일= [[615년]]
|출생지= [[사비]]사비성
|사망일= [[682년]] (68세)
|사망원인= 병사 (노환)
|매장지= [[낙양]] [[북망산]]<br />[[부여 능산리 고분군]](가묘, 假墓)
|국적= [[백제남부여]] → [[당나라]]
|별칭=
|별칭= 자(字)는 융(隆)<br />피휘한 이름은 숭(崇)
|경력=
|경력= 남부여 태자 → 사농경 → 웅진도독 → 겸 태상원외경
|직업= [[정치가]], [[장군]]
|작위= 남부여군공 → 대방군왕
|칭호= 광록대부(문산관)<br />보국대장군(무산관 추증)
|적수=
|적수= [[부여효]](형제)<br />[[부여풍]](형제 혹은 작은아버지)
|자녀= [[부여덕장]]
|부모= [[의자왕]]
|친척= [[부여경]](손자)<br />[[부여태]](형제)<br />[[복신]](당숙?)
|관련활동= 남부여 부흥운동 진압, 남부여 유민 위무
}}
'''부여융'''(扶餘隆, [[615년]] ~ [[682년]])은 [[남부여]] [[의자왕]]의 [[아들]]로아들이자 [[삼국 시대|삼국당나라]] 말기의 대표적인 경계인이다장군이다. [[자 (이름)|자]]는 [[이름]]과이름과 같은 융(隆)이다. '''숭'''(崇)이라고도 한다.<ref>《[[당회요]]》, 《[[통전]]》(通典). [[당 현종]]의 이름인 이융기(李隆基)를 [[피휘]]</ref> 남부여 멸망 후 [[당나라]]에 [[귀순]]하여귀순하여 [[백제남부여 부흥운동]] 토벌에 협조하고 남부여군공 웅진도독으로 부임하여 유민들을 약탈하였다. 광록대부 태상원외경 겸 웅진도독 대방군왕까지 임명됐으나, 당의 [[웅진도독부]]는 [[신라]]에 의해 한반도에서 축출되어 [[요동]]으로요동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이주했다. 부여융이 마지막 [[태자]]인지에태자인지에 관해서는 학설 대립이 있다.
 
== 생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