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 필암서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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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24년]](인조 2) 추담 김우급(金友伋)등 지방 선비들의 노력으로 기산리(岐山里) 서쪽 증산동(甑山洞)에 이건 복설하였다.
* [[1658년]](효종 9) 복설 이후 서원의 지위 고양을 위한 전라도 유생 오이익(吳以翼. 오희길 종질)을 소두(疏頭)로 사액(賜額) 청원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 [[1659년]](효종 10) 3월 ''''필암''''(筆巖)이라 사액(賜額)이 내려졌다. 이조 판서·양관(兩館) 대제학에 추증하고, '문정(文靖)]'의 시호가 내려졌다.
* [[1662년]](현종 3) 2월 [[조선 현종|현종]]의 어필로 ''''필암서원''''(筆巖書院)이라 선액(宣額)하고, 예조정랑 윤형계(尹衡啓)를 예관(禮官)으로 보내 사제(賜祭) 하였다. 이로써 [[필암서원]]은 경제력을 확보하여 서원으로서의 규모와 기능을 갖추고, 사회적 지위와 위상을 높힐 수 있었다.<ref>사액(賜額)은 1659년에 내려지고, 실제 선액(宣額)은 1662년에 이루어 졌다. 선액(宣額)이란 임금이 친필로 서원의 이름을 지어 편액(扁額)을 하사하는 것을 말한다.</ref>
* [[1672년]](현종 13) 3월 서원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고, 마을 이름도 해타리(海打里)에서 [[필암리]](筆岩里)로 바뀌었다. 이건(移建)에는 원장 [[송준길]](宋浚吉)의 협조와 남계 이실지(李實之. 1624~1702)·기정연(奇挺然. 1627~?, 금강 현손)·박승화(朴升華, 백우당 증손)등의 노력이 있었다. 이건 작업의 완성으로 서원은 사액(賜額) 서원답게 면모를 일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