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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린성'''(길림성, {{zh|c=吉林省|p=Jílín Shěng}}; {{llang|mnc|girin ula}})은 [[중화인민공화국중국]] 동북부의만주 서부의 성이다.
 
== 역사 ==
고대에 지린성 동부의 삼림지대에는 [[퉁구스]] 계의 수렵민족이 거주했고, 성 중부의 평원지대에는 동이족 계열의 [[부여]]가 건국되었다.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고구려]]는 성 서남부의 [[지안 시 (퉁화 시)|지안]]을 거점으로 하여 일대 강국을 건설했다. 고구려는 기원전부터 [[668년]]까지 지린성의 거의 대부분을 통치하였고,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에는 [[발해]]가 [[당나라]]를 몰아내고 [[698년]]부터 [[926년]]까지 이 지역을 통지했었다. 이후 지린성은 [[거란]]이 세운 [[요나라]]의 판도에 들어갔다. [[여진족]]의 [[금나라]]와 [[몽골족]]의 [[원나라]] 역시 통치했었다.
 
청 초기에 [[영고탑]]이 지린으로 이주하면서 지린성이 설치되었다. 이 때에는 지린장군의 통치하에 있었는데, 이 시기의 지린성은 동쪽으로 현재 러시아의 프리모르스키 지방의 거의 대부분을 통치하고 있었으며 [[동해]]에 맞닿아 있었다. 한족의 이주는 엄격히 금지되었었다.
 
그러나 [[프리모르스키 지방]](연해주)이 [[베이징 조약]]으로 [[1860년]]에 [[러시아]]로 넘어가면서부터 청조(淸朝)는 [[한족]]의 이주를 허용하기 시작하였는데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산둥 성]] 지역에서 건너왔다. 20세기가 시작될 무렵에는 이미 한족이 이 지역의 주된 민족그룹이 되어 있었다. [[1932년]]에는 일제의 괴뢰정부인 [[만주국]]이 세워지면서 '''지린성'''은 그 판도에 속하게 되며 '''지린성'''의 [[창춘]]은 만주국의 수도였다. 일제가 [[1945년]]에 패망하면서 이 지역의 중국의 다른 동북지역과 만찬가지로 [[소비에트 연방]]의 공산주의자들의 수중에 떨어지게 된다. [[1946년]] [[통화 사건]]으로 [[인민해방군]]과 [[독립군]]은 [[일본군]] 패전병을 진압했다.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은 만주를 발판으로 하여 다른 중국 지역을 점령하기에 이른다.
 
1949년의 '''지린성'''은 현재보다 훨씬 작아서 단지 [[창춘]]과 [[지린시]] 일대를 포함할 뿐이었다. 당시의 성도는 [[지린시]](吉林市)였고, [[창춘]](長春)은 성으로부터 독립된 직할지역이었다. 1950년대에 지린성은 확장되어 현재의 경계를 확정한다.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지린성은 팽창하여 네이멍구의 일부를 차지하면서 한때는 경계의 일부를 [[몽골]]과의 국경으로 설정하기도 하였으나 후에 복귀되었다. 현재 지린 성은 중공업에 기반한 다른 중국의 둥베이 지방과 마찬가지로, 사유화와 관련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있다. [[1954년]] 9월 27일에는 지린성 인민정부가 지린시에서 창춘시로 이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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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린 성은 주민의 거의 대부분이 [[한족]]이나 [[조선족]], [[만주족]], [[회족]], [[몽골족]], [[시버족]]등이 거주하고 있다. 지린 성에 거주하는 조선족들은 대부분 [[연변 조선족 자치주]]와 [[장백 조선족 자치현]]에 거주한다. 몽골족들은 [[첸궈얼뤄쓰 몽골족 자치현]]에 거주하고 만주족들은 [[이퉁 만족 자치현]]에 거주한다.
 
== 같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