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종 (고려):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Gcd822 (토론 | 기여)
잔글 →‎민심안정책: 링크
Gcd822 (토론 | 기여)
→‎외국 인재 영입: 중복 제거, 링크
80번째 줄:
=== 개혁 정책 ===
===== 외국 인재 영입 =====
[[956년]] [[후주]]에서 보내온 책봉사 [[설문우]]를 따라 온 [[쌍기]] 등에게 매료된 광종은 이들을 고려로 영입할 계획을 세운다. [[중국]] 출신 귀화인이던 [[왕륭왕융 (고려)|왕융]]을 통해 [[중국]]의 정세를 어느 정도 접했던 그는 후주의 개혁을 주도한 인물들의 존재를 알게 되고 그들 중 일부가 설문우를 따라 고려로 오자 이들과 대화하고 이들을 영입하려 하였다.
 
2차 책봉사의 수행원으로 [[고려]]에 당도한 쌍기는 얼마 후 병에 걸려서 사신 일행과 함께 중국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이를 두고 미리 계획된 일이었다는 시각도 있다. 그에 의하면 이것은 미리 계획된 일인것인지도 모른다<ref name="pare199691"/> 는 것이다. 즉 '와병을 핑계하여 환국하지 않고 있다가 사신 일행이 돌아간 다음에 광종과 대면한다는 계산이었을 것이다.<ref name="pare199691"/>' 책봉사 일행이 돌아간 뒤 쌍기는 병상에서 일어났고, 바로 광종과 대면하게 된다. 쌍기를 만난 광종은 그의 개혁적인 성향과 뛰어난 식견에 감탄하여 [[후주]]의 세종에게 국서를 보내 쌍기를 고려의 신하로 삼을 수 있도록 하게 해달라고<ref name="pare199691"/> 요청한다. 후주의 쌍기는 [[고려]] 조정에 전격 등용된다.<ref name="pare199692"/> 그 뒤로도 광종은 사람을 보내 [[후주]]의 개혁을 담당했던 인물들을 만나보도록 공식, 비공식 사절과 유학생들을 파견한다.
 
[[쌍기]]는 [[후주]]에서 귀화하게 되는 인물로, [[후주 태조]]의 치하에서 절도순관, [[장사랑]], 시(試) 대리평사 등을 지냈다. 시대리평사는 [[시험]]을 주관하는 관리였기 때문에 [[과거 제도]]에 대한 지식이 많은 인물이었다<ref name="pare199691"/> 광종은 유학에 정통하 신진 [[유학자]]들도 함께 등용하여 과거 시험을 출제할 이론, 주제 등을 준비하게 한다.
88번째 줄:
쌍기는 그에게 호족들의 사병을 혁파시킬 것을 건의한다. 쌍기가 들고 나온 전략이 바로 경쟁자의 강점에서 약점을 찾는 전략이었다. 호족들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은 호족들에게는 가장 큰 강점이지만 가장 큰 약점이었다.<ref name="kwak23"/> '호족들이 거느린 사병은 전쟁에서 패하여 포로로 잡혀온 노비이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호족들에게 목숨을 걸고<ref name="kwak23"/> 충성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ref name="kwak24">곽준식, 《마케팅 리더십》 (도서출판 살림, 2005) 24페이지</ref>' 이 점을 파악한 광종은 노비들의 해방을 꾀한다.
 
[[955년]] 대상 왕륭이[[왕융 (고려)|왕융]]이 주나라를 다녀온 적이 있는데, 이때 광종은 주나라의 인재를 초빙해오라는 밀명을 내린 듯 하다. 왕륭[[왕융 (고려)|왕융]] 역시 중국에서 귀화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광종의 이러한 요구에 쉽게 순응했던 것이다.<ref name="pare199691"/> 광종은 쌍기 이외에도 함께 왔던 [[후주]]의 학사들을 고려에 줄 것을 [[후주 세종]]에게 청하여 승낙받는다. 친위세력이 없었던 그는 [[중국]]인 출신 귀화인들을 통해 자신의 친위세력을 구성하였다. 여기에 귀화인 중 한사람인 쌍기의 건의로 실시된 [[과거]]로 뽑아들인 인재들을 통해 친위세력을 한층 강화하였다.
 
===== 개혁 정치 시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