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세계청년화가대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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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대표<ref>박승숙, <권태를 모르는 위대한 노동자>, 인물과사상, 2019, 79쪽 & 102쪽 & 133~159쪽.</ref><ref>케이트 림, <박서보: 단색화에 담긴 삶과 예술>, 마로니에북스, 2019, 105~126쪽.</ref> ====
 
한국은 1950년 55번째 유네스코 회원국으로 가입했지만 6.25 전쟁으로 아무 활동도 하지 못했고, 1954년 1월 30일이 되어서야 서울대 강당에서 [[유네스코 한국위원회]]를 창립했다.<ref>대한민국 발전의 초석에서 지구촌 나눔의 지역으로: 유네스코한국위원회 60년사, 1954-2014, 2014.</ref> 1961년 파리 세계청년화가대회에 참가할 대표를 선정해 보내라는 통지가 도착했을 때 위원장은 6대 [[오천석]] 문교부장관이었고, 실제로 행사가 치러질 때는 8대 위원장 [[문희석]] 문교부장관이 임기 중이었다. 아직 유네스코 회관이 서울 명동에 건립되기(1967년) 전이었고, 국제조형예술협회 한국위원회도 없었을 때다.
 
당시 한국 화단에는 1949년에 설립된 대한미술협회가 있었고, 그에 반발하여 [[장발]] 교수를 중심으로 서울대 미대파가 따로 독립해 나와 1955년에 설립한 [[한국미술가협회]]가 있었다. 1961년 [[박정희]] 군사정부의 문화예술단체 통합정비와 재편성 정책에 의해 두 협회는 6월에 공식 해체되었고, 그 해 12월에는 둘을 통합하는 선거를 다시 치렀다. 그렇게 탄생된 통합협회가 [[한국미술협회]]다. 현재 사단법인으로서 국제조형예술협회 한국위원회를 같이 맡고 있지만, 국제조형예술협회 회원국으로 가입한 것은 파리 청년작가대회가 개최된 이후인 1962년 8월 9일이다. 따라서 유네스코에서 한국 대표를 파견하라는 통지서는 유네스코 한국위원회를 통해 1960년 대한미술협회로 보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표 청년화가로 박서보가 선정되었다. 당시 박서보는 참가자의 나이 제한 상한선인 만 30세에 딱 걸렸다.
 
다행히 유네스코에서 아시아 작가들의 참가를 돕기 위해 아시아에서 참여하는 작가들 전체에 미화 2500달러를 지원하기로 했고, 결과적으로 박서보에게 돌아오는 몫은 정확히 357.14달러였다. 당시 단칸방을 전전하며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던 박서보는 전세금을 빼서 아내에게 반을 나눠주고 어린 아들과 함께 친정에 내려가 있으라 하고 나머지 반인 40달러를 여비로 챙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공권을 살 돈이 없어 [[아시아 재단]] 서울 사무소에 무턱대고 찾아간 박서보는 어렵게 지원금 1341달러를 지원 받았다. 당시에는 김포공항에 파리행 국제 비행기가 들어오지 않아서 박서보는 일본 하네다 공항으로 가서 거기서 파리로 가는 [[팬아메리카]] 항공기를 타야 했다.
 
1961년 1월 2일부터 28일까지 있을 대회에 조금 늦어졌지만 박서보는 1961년 1월 3일 김포공항을 떠나 다음날인 1월 4일 새벽 일찍 일본에서 파리행 비행기에 올랐다. 하지만 파리에 도착하고 나서야 박서보는 대회가 10개월 뒤로 미루어졌음을 알게 되었다. 1961년 9월 28일에 개최될 제2회 파리 비엔날레와 시기를 맞추려고 대회를 10개월 뒤로 연기한 것이다. 국제조형예술협회 프랑스위원회에서 1960년 11월 22일자 서신으로 한국에도 통지했지만, 당시 대한미술협회는 실질적으로 활동이 중단되어 있어서 통지를 정확히 받지 못했다. 임시 의원장으로 직무를 대행하던 조각가 [[김경승]]이김경승이 불어로 공문이 오니까 열어보지도 않은 채 서랍에 넣고 해외로 나가버려 일이 그렇게 되었다. 무턱대고 친구들에게 신세 지며 파리에 남아 버티고 있는 중에 뒤늦게 6월에 그러한 사실이 밝혀져 국제조형예술협회 프랑스위원회는 오해를 풀고 박서보에게 이후 숙소와 식사를 제공해주기로 결정했다. [[아시아재단]]에서도아시아재단에서도 박서보에게 추가로 미화 600달러의 지원금을 보내주었다.
 
박서보는 1961년 10월 2일부터 28일까지 세계청년화가대회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합동전을 하고, 경연대회에서 1등 수상의 명예를 안고, 대회에서 만나 친해진 오스트리아 대표 [[아돌프 프로너]]의 [[비엔나]]에 있는 자택을 방문하여 잠시 체류한 뒤 11월에 귀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