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계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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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 없음
|종교 =
|가문 = 부여씨
|왕조 = [[백제]]
|연호 =
|목록 = [[백제의 역대 국왕|백제의 제9대 어라하]]
}}
'''책계왕'''(責稽王, ? ~ [[298년]], 재위 : [[286년]] ~ [[298년]])은 [[백제]]의 제9대 국왕이다. [[백제 고이왕|고이왕]]의 아들로 청계왕(靑稽王) 또는, 책찬왕(責贊王)이라고도 부른다. 체격이 크고 의지와 기품이 걸출하였다고 한다.
 
== 생애 ==
고이왕의 맏아들이며 왕비는 대방왕(帶方王)의 딸 보과(寶菓)이다. 체구가 장대했다고 한다. 《[[삼국사기]]》[[백제]]본기에 따르면 [[286년]]에 수도인 [[위례성]]을 화려하게 수리하고 [[고구려]]의 침입을 막고자 아차성과 사성을 수축했다고 한다수축했다.
[[298년]] 음력 9월, 한나라군한군(漢軍)이 낙랑과 맥인(貊人)들을 이끌고 침입하였고침입했을 왕이 직접 나가서출전하였으나 방어하다가백제가 전사하였다크게 패했고 책계왕도 사망하였다.
 
재위기간은 [[286년]]부터 [[298년]]까지이다. 일명 청계(靑稽) 또는 책체(責替)라고도 한다. 고이왕의 맏아들이며 왕비는 대방왕(帶方王)의 딸 보과(寶菓)이다. 체구가 장대하고 의지가 굳세었다고 한다. [[286년]] (책계왕 1)에 [[고구려]]가 대방을 공격하였을 때 대방왕이 사위인 그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군사를 보내어 [[고구려]]군을 물리쳤다. 이 때문에 [[고구려]]와의 사이가 나빠져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여 아차성(阿且城) 지금의 서울 광장동 아차산성)과 사성(蛇城) 지금의 서울 풍납동토성)을 수축하였다. 그러나 [[298년]] 한군(漢軍) 낙랑의 군대과 맥인(貊人) 동예로 추정됨의 침입에 맞서 싸우다가 적병에게 살해되었다.
 
== 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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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품왕]] ([[253년]]~[[291년]])
* [[거질미왕]] ([[291년]]~[[346년]])
* [[오진 천황]] ([[270년]]~[[310년]])
 
{{전임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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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298년 죽음]]
[[분류:작전 중 사망한 군주]]
[[분류:부여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