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총독부 청사와 관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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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후 1945년 10월에 국립과학박물관으로 개칭되었고, 1948년에 국립과학관으로 개편되어 청사를 사용하다가 [[한국 전쟁]] 때 소실되었다.<ref>{{웹 인용|url=http://contents.archives.go.kr/next/content/listSubjectDescription.do?id=000075|제목=국립중앙과학관|저자=국가기록원 나라기록|날짜=2006-12-01|확인날짜=2011-09-05|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0304131842/http://contents.archives.go.kr/next/content/listSubjectDescription.do?id=000075|보존날짜=2016-03-04|url-status=dead}}</ref>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앞 도로변에 1995년 9월에 ‘김익상의사 의거 터’ 표석과 2003년 12월에 ‘통감부 터’ 표석이 설치되었다.<ref>이순우 저, 위의 책, 40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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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Japanese General Government Building at Waeseongdae 03.jpg|총독부 초기 전경
파일:Japanese General Government Building at Waeseongdae 02.jpg|증축 이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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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호텔|조선철도호텔]]을 설계한 독일인 건축가 [[게오르크 데 랄란데]]가 1912년부터 총독부 청사의 설계에 착수하여 1914년에 사망하기 전까지 기초 설계를 마쳤고,<ref>{{서적 인용|저자=건축사사무소 새한|제목=구 조선총독부 건물 실측 및 철거 보고서 (상)|날짜=1997-04-30|출판사=문화체육부 국립중앙박물관|쪽=36}}</ref> 라단데가 사망한 후에는 일본인 건축가 [[노무라 이치로]], [[구니에다 히로시]] 등이 청사의 설계를 완성하였다.<ref>김정동 저, 위의 책, 208 ~ 210쪽.</ref> 총독부의 직영공사 체제였으나 1차 공사는 일본 건설 회사 오쿠라구미(大倉組, 현 다이세이건설), 2차 공사는 시미즈구미(淸水組, 현 시미즈건설) 경성지점이 시공하였다.<ref>새한, 위의 책, 41쪽.</ref> 1916년 6월 25일에 땅의 신(地神)에게 공사의 안전과 건물의 번영을 기원하는 제사 의식인 [[지진제]]를 [[신토]] 방식으로 근정문 앞뜰에서 거행하였다.<ref name="신청사"/> 1916년 [[7월 10일]]에 착공하여<ref name="이백십칠"/> 1920년 7월 10일에는 [[정초식]]을 거행하여 제5대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의 휘호가 새겨진 정초석을 설치하였으며,<ref>{{서적 인용 |저자=허영섭|제목=일본, 조선총독부를 세우다|날짜=2010-02-27|출판사=채륜|쪽=327 ~ 329|id={{ISBN|89-93799-11-3}}}}</ref> 1923년 5월 17일에 [[상량식]]을 거행하였다.<ref name="이백십칠">김정동 저, 위의 책, 217쪽.</ref> 1926년 1월 4일에 건물을 완공하여 시용식을 거행하였고<ref name="신청사"/> 같은 해 10월 1일 시정기념일에 맞추어 건물의 완공을 축하하는 의식인 낙성식을 가졌다.<ref>김정동 저, 위의 책, 219쪽.</ref>
 
총독부 청사의 신축 공사는 처음에는 5개년 계획과 300만 엔의 예산으로 시작하였지만 완공까지 10년이 걸렸고, 675만 1,982엔의 예산이 소요되었다.<ref>허영섭 저, 위의 책, 417쪽.</ref> 청사 신축 과정에 조선인 건축가로 조선총독부 토목부 건축과 [[기수]] [[박길룡]]과 이훈우(李雨), 고용직으로 이규상(李圭象), 김득린(金得麟), 손형순(孫亨淳), 박동린(朴東麟) 등이 참여하였고, 일본인과 중국인 석공 300명과 조선인 노동자 2백만 명(연인원)이 동원되었다.<ref name="이백십칠"/>
 
총독부 신청사는 당시 일본의 본토와 식민지에서 가장 큰 건축물이었으며 동양 최대의 근대식 건축물이었다.<ref>윤홍기 저, 위의 책, 296쪽.</ref> 건물 안쪽에 뜰을 배치한 ‘日’자형 평면에 지층과 지상 4층을 올린 총건평 9,600여 평의 건물로 철근 콘크리트 구조에 벽돌로 기둥 사이의 벽을 채우고 외부를 화강석으로 마감한 위에 돔 모양의 중앙탑옥을 얹었다. 르네상스 양식에 [[바로크|바로크 양식]]을 절충한 [[네오르네상스 건축|네오르네상스 양식]]으로 식민지 지배기구로서의 권위를 강조하였다. 총독부 청사의 준공과 함께 [[광화문]]은 경복궁의 동쪽으로 이전되었고 청사 앞에는 광장이 조성되었다.<ref name="신청사">{{웹 인용|url=http://www.815book.co.kr/sajuk/bEQp/|제목=조선총독부 신청사 터|저자=국가보훈처·독립기념관|확인날짜=2011-09-05}}{{깨진 링크|url=http://www.815book.co.kr/sajuk/bEQp/ }}</ref> 청사의 건축에는 조선에서 산출된 목재와 화강석, 대리석, 석회를 주재료로 사용하였고 공예품, 조각 등의 장식재는 해외에서까지 수입해서 시공하였으며,<ref>김정동 저, 위의 책, 212 ~ 217쪽.</ref> [[조선은행]]과 철도호텔에 이어서 조선에서 세 번째로 아홉 대의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다.<ref>허영섭 저, 위의 책, 343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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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 중앙홀의 남북 벽면에는 일본인 서양화가 [[와다 산조]]가 조선의 [[금강산]] 선녀 전설과 일본의 [[미호의 마쓰바라]]에 전해오는 [[날개옷 설화|하고로모 전설]]을 모티브로 하여 제작한 벽화 《하고로모》(羽衣)가 설치되었다.<ref name="벽화">{{뉴스 인용|제목=舊조선총독부 벽화 28일까지 철거완료|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4033501|출판사=연합뉴스|날짜=1996-07-22|확인날짜=2011-09-05}}</ref> 벽화는 두 전설의 친연성을 강조하여 당시 조선총독부의 통치 이념인 [[내선일체]]를 상징하였고,<ref>김정선, 〈조선총독부 벽화에 관한 고찰 - ‘내선일체’의 표상에서 ‘근대 벽화’로〉, 《미술사논단》26, 2008년.</ref> 총독부 청사의 해체 당시에 분리되어 [[국립중앙박물관]]의 수장고에 보관 중이다.<ref name="벽화"/> 와다 산조의 벽화 외에도 중앙홀에는 일본인 조각가 [[아사쿠라 후미오]]가 조각한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사이토 마코토의 동상이 세워졌다.<ref>허영섭 저, 위의 책, 424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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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orean Government-General Office Lantern.jpg|중앙탑옥
파일:Korean Government-General Office Outer Wall.jpg|동남외각옥 정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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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8월 15일에 광복 50주년 경축식에서 총독부 청사 중앙돔 랜턴의 해체를 시작으로 철거에 들어갔다. 1995년 8월에 일부 서울특별시 시의원들이 [[서울시의회]]에 청사의 역사적 가치와 경제적 이유로 ‘구 조선총독부 건물철거보류 동의안’을 제출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舊총독부 건물 철거보류 동의안 제출 논란|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938125|출판사=연합뉴스|날짜=1995-08-19|확인날짜=2011-09-05}}</ref> 1996년 6월에는 〈국립중앙박물관 건물 보존을 위한 시민의 모임〉이 서울지방법원에 ‘건물 훼손 및 철거 금지 가처분 신청’을 하였지만 1996년 7월에 서울지방법원은 가처분 신청을 각하하였다.<ref name="이사구"/> 1996년 11월 13일에 총독부 청사의 지상 부분 철거가 완료되었고<ref>{{뉴스 인용|제목=舊조선총독부건물 지상부분 철거완료|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4123628|출판사=연합뉴스|날짜=1996-11-13|확인날짜=2011-09-05}}</ref> 1998년 8월 8일에 [[독립기념관]]은 중앙돔 랜턴과 건축부재로 ‘조선총독부 철거부재 전시공원’을 개원하여 일반에 공개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조선총독부 철거 부재 전시공원 개원|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4332699|출판사=연합뉴스|날짜=1998-08-08|확인날짜=2011-09-05}}</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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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hibition of Japanese Government-General Building Remains 01.JPG|총독부 철거부재
파일:Exhibition of Japanese Government-General Building Remains 02.JPG|총독부 철거부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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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후 1946년 4월 25일에 민속학자 [[송석하 (민속학자)|송석하]]의 주도에 의해서 국립민족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가 1950년에 국립박물관 남산 분관으로 흡수되었다. 1954년 6월에 [[대한민국 합동참모본부|연합참모본부]]가 신설되자 청사로 사용하였고 국립박물관은 [[석조전]]으로 이전하였다. 하지만 이후 건물이 언제 철거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현재 [[서울종합방재센터]]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다목적 광장이 건물의 위치로 추정된다.<ref name="이순우">{{뉴스 인용|제목=통감관저, 잊혀진 경술국치의 현장|url=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65865|출판사=오마이뉴스|저자=이순우|날짜=2005-07-03|확인날짜=2011-09-05}}</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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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Japanese legation to Korea, c.1900.jpg|일본 공사관 (1900년경)
파일:Official residence of Governor General of Korea, Namsan 01.jpg|통감 관저 (19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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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총독 관저는 호화로움에도 불구하고 도심과 거리가 멀었고 전기료 등의 유지비의 과다, 경비의 어려움 등의 제반 문제로 인하여 공식 연회 등의 행사 이외에는 사용하지 않고 방치되었고<ref name="총독관저"/> 조선을 찾은 일본 황족이나 서양의 귀빈들을 위한 숙소와 연회 장소로 간혹 사용하였다. 평상시에는 거의 비어 있는 공간이어서 그때마다 대대적으로 건물을 수리하고 조경 공사를 하였다.<ref name="시사저널"/> 중간에 용산 총독 관저로 관저를 이동하려는 계획이 수립되었으나 실제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ref name="총독관저"/> 1950년 한국 전쟁 때 멸실되었다.<ref name="시사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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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Official residence of Governor General of Korea, Yongsan 01.jpg|관저 전경
파일:Official residence of Governor General of Korea, Yongsan 03.jpg|관저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