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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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이래 [[38도선]] 부근에 걸쳐 국지전이 빈번하였다. 특히 [[조선인민군]]은 [[대한민국]] 관할하에 있던 [[옹진반도]], [[개성]], [[의정부]], [[춘천]] 그리고 [[강릉]] 등의 접경지역을 주 공격 목표로 삼았다. [[김일성]]은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남침을 48번이나 건의했고 스탈린은 시기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이를 거절했다. 결국, [[미군]]이 철수한 시점에 김일성은 스탈린의 남침 승인을 받아내고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사적 지원을 등에 업고 1950년 6월 25일 [[대한민국]]에 대대적인 기습 남침을 감행했다.
 
전쟁 초기 기습으로 인해 패전을 거듭한 [[대한민국 정부]]와 [[대한민국 국군]]은 3일 안에 수도 [[서울]]을 함락당하는점령당하는 등 정부 주요인사들은 [[대전]], [[대구]], [[부산]]으로 피난을 가면서 [[부산]]을 임시 수도로 정하고 [[조선인민군]]이 [[낙동강]] 부근까지 진출했다. [[국제연합군]] 파병과 [[더글라스 맥아더]]의 [[인천 상륙 작전]]을 시작으로 대한민국 측이 반격을 시작해 [[9월 27일]]에 [[서울]]을 탈환시키고점령하고, [[10월 1일]]에는 [[38도선]]까지 점령해서 원점으로 돌아갔다. 임무를 완수한 국제연합군은 철수할 것을 검토했으나, [[이승만]]의 주도로 응징론이 대두되면서, 국제연합군은 새로운 총회 결의를 바탕으로 거듭해서 [[10월 26일]]에는 [[압록강]] 부근까지 진출하지만 [[중국인민지원군]]의 개입과 소련의 지원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멸망의 위기를 극복하였고 전쟁은 국제전의 양상을 띠며 38도선 부근에서 장기화되었다. 이후 교착을 거듭하다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 설정된 군사 분계선을 경계로 오늘날까지 휴전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한국 전쟁은 그 밖에도 약 20만 명의 전쟁 미망인과 10여만 명이 넘는 전쟁 [[고아]]를 만들었으며 1천여만 명이 넘는 [[이산 가족]]을 만들었다. 그리고 한반도 내에 45%에 이르는 공업 시설이 파괴되어 경제적, 사회적 암흑기를 초래했다. 무엇보다도, 이 전쟁으로 인해 양측 간의 적대감이 극도로 팽배하게 되어 한반도 분단이 더욱 고착화되었다.
 
=== [[한국 전쟁]] 이후 [[김일성]] 정권의 시작 ===
[[파일:Kim Il Sung Portrait-2.jpg|섬네일|[[김일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