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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초까지 관동군이 만주의 거의 모든 지역을 장악해버리자, 당연히 장쉐량의 동북군은 고향에서 쫓겨났다.<ref name="아라이"/> 그런 일들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는 것은 장쉐량의 본심이 아니었지만, 그는 최고지도자였던 [[장제스]]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다.<ref name="아라이"/>
 
1932년 1월 말, 항일 운동이 거센 [[상하이]]에서 일본 해군 육전대와 중국군의 충돌이 일어나자 [[3월 1일]], [[왕징웨이]] 등에 의한 둥베이 행정위원회가 [[만주국]]의 성립을 선포하였고 만주는 일본의 중국 침략 전쟁을 위한 병참 기지화되었다. [[3월 9일]] [[푸이]]가 집정에 취임,<ref>[https://news.joins.com/article/16020120 “나도 피해자” 우기던 푸이, 일제 만행 확인하고 통곡] 중앙일보 2014년10월5일자</ref> 새로운 국가로 출발하였다.
 
[[국제 연맹]]은 중국 측의 제소에 따라 [[리튼 조사단]]을 파견하고 조사 보고서를 채택, 일본군의 철수를 권고하였으나 러허성마저 점령한 일본은 이를 거부하였으며 [[1933년]] 3월 [[국제 연맹]]을 탈퇴하였다. 이러한 사건은 일본의 군부는 일본 정국을 장악하고 정당 내각 정치에 종지부를 찍고 군국주의 체제를 확립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는 침략 전쟁의 시작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