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경명: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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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직자인물 정보
| 이름= 고경명
| 원래 이름 = 高敬命
| 출생일= [[1533년]] [[11월 30일]]
| 출생지= [[조선]] [[전라도]] [[광주광역시|광주목]] 압보촌<br/>(現 대한민국 [[광주광역시|광주]] 남구 대촌면 압촌마을)
| 사망지= [[조선]] [[전라도]] [[금산군]] 와우평와은평 벌판(現 대한민국 충청남도 금산군)에서 전사(칼에 베어 사망)
| 사망일= {{사망일과 나이|1592|7|10|1533|11|30}}
| 임기 = [[1581년]] ~ [[1582년]]
| 군주 = [[조선 선조|조선 선조 이연]]
| 거주지= [[광주광역시|조선국 전라도 광주목]] 압보촌
| 국적=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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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력= 1558년 식년시 문과 갑과 1위(장원).
| 경력= 문신, 정치인, 작가, 의병장
| 직책 = 前 조선국 [[전라도]] [[영암군]] 군수 <br/> (前 朝鮮國 全羅道 靈巖郡 郡守)
| 종교= [[유교]]([[성리학]])
| 배우자=김씨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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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모= 고맹영(부)
| 친인척= [[김백균 (조선)|김백균]](장인)
|정당= 서인 세력 후예
|웹사이트=
}}
 
'''고경명'''(髙敬命, [[1533년]] [[11월 30일]] ~ [[1592년]] [[7월 10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의병장]]이다. 자는 이순(而順), 호는 제봉(霽峰)·태헌(苔軒)·태사(苔槎), 본관은 [[장흥 고씨|장흥]](長興)이며, 시호는 충렬(忠烈)이다.<ref>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http://people.aks.ac.kr/view.jsp?id=PPL_6JOb_A1533_1_0000386</ref>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좌도 의병대장으로 활약하다 금산 전투에서 순국하였다. 그의 생전에는 [[1591년]](선조 24)[[광국공신|광국]][[원종공신]] 1등에 특별히 책록되었고, 사후에는 의병장으로 활동한 공로로 [[1605년]](선조 38) [[선무공신|선무]][[원종공신]] 1등에 추서되었다. [[백인걸]]의 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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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초기 활동 ===
[[1533년]] 광주 압보천압보촌(鴨保村)<ref>대한민국 [[광주광역시|광주]] 남구 대촌면 압촌마을</ref>에서 대사간 [[고맹영]]과 성균관진사 서걸의 딸 남평서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고운은 [[조광조]]와 친하게 지냈다는 이유로 승의랑, 형조좌랑 등을 지냈으나 [[1519년]] [[기묘사화]]로 관작을 삭탈당하고 고향에 내려와 여생을 보냈다. 그는 어려서부터 성인과 같아서 [[백인걸]]이 유독 그를 칭찬하고 아꼈다. 남평현감(南平縣監)으로 근무할 때 그를 처음 본 [[백인걸]]은 그가 범상치 않은 아이임을 알고 그를 아꼈다. [[백인걸]]의 문하에서 시서와 경사 등을 수학하였다.
 
그는 젊어서 해서, 황해도에 갔다가 한 기생을 데려오려 했으나 끝내 데려오지 못했다. 그는 기생의 치마폭에 시를 남겨주고 떠났는데 "강머리에 말을 세워 이별 슬퍼 지체하니, 높은 버들가지만큼 미운 마음 이는구나, 미인은 정이 엷어 새 사람에 마음 두나, 사나이는 정이 깊어 뒷날 기약 다짐하네. 복사꽃 떨어지는 이 좋은 한식철에, 자고새 황혼시에 날아갔다 날아오네. 남포의 풀 우거지고 봄 물결은 출렁이니, 마름꽃에 정을 담아 꺾어가서 두리로다."라고 하였다. 뒤에 새로 온 황해도 관찰사가 기생의 치마에 쓰인 시를 읽고 시재를 감탄하고, 그 사연을 물어보았다. 나중에 감사가 고맹영을 만나자 당신 아들 고경명은 재주와 얼굴이 뛰어났지만, 행동에는 좋지 않은 면이 있다며 비꼬았다. 그러자 고맹영은 자기 아들의 모습은 제 어미를 닮았지만 행동은 나를 꼭 닮았다며 웃자 관찰사도 함께 웃었다 한다. 현호쇄담에 실린 내용으로 여기에 그가 지었다는 시 1수가 전언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