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극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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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공직자 정보
|이름 = 배극렴(裵克廉)성산백 배극렴
|원래 이름 = 星山伯 裵克廉
|출생일 = [[1325년]]
|그림 = Haposeong Site (합포성지) 01.jpg|섬네일|600px
|그림 =
[[파일:Haposeong|그림설명 Site= (합포성지) 01.jpg|섬네일|300px|1378년, 배극렴이배극렴 장군이 합포(현재의 창원시 마산회원구)에 쌓게 한 [[합포성지]]]]
|그림설명 =
|사망일 = [[1392년]] [[12월 10일]] (68세)
|출생지 = [[고려]] [[경상도]] [[경산시|경산부]] [[성주읍|성산현 성주읍]] 대황리<br/> (現 [[대한민국]]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대황리)
|사망지 = [[조선]] [[황해도|서해도]] [[개성특급시|송도]] <br/> (現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개성특급시]])
|별명 = 자(字): 양가(量可) <br /> 호(號): 주금당(晝錦堂), 필암(筆菴) <br /> 시호(諡號): 정절(貞節)
|종교 = [[불교]] → [[유교]]([[성리학]])
|배우자 = [[순흥 안씨]] 부인
|본관 = [[성주 배씨|경산]](京山)
|임기 = [[1377년]] ~ [[1378년]]
|군주 = [[고려 우왕|고려 우왕 왕우]]
|섭정 = [[공원왕후|공원왕태후 남양 홍씨]]
|직책 = 前 [[고려|고려국]] 경상도 도순문사<br/>(前 高麗國 慶尙道 都巡問使)
|거주지 = [[고려]] [[개성특급시|개경]] <br/> [[조선]] [[한성부|한성]]
|정당 = [[무소속]]
|자녀 = 1녀
|직책2 = 前 [[조선|조선국]] [[영의정|영의정부사]]<br/>(前 朝鮮國 領議政府事)
|군주2 = [[조선 태조|조선 태조 이단]]
|임기2 = [[1392년]] [[7월 28일]] ~ [[1392년]] [[11월 26일]]
|계급 = 조선국 삼군도총제부 중군총제사(朝鮮國 三軍都摠制府 中軍摠制使)
|자녀 = 슬하 1녀
|부모 = 배현보(부), [[성주 이씨]] 부인(모)
|형제 = 배극귀(형)
|친인척 = 배신경(할아버지) <br /> 반자건(사위) <br /> 배유(증조부) <br /> 이천년(외조부) <br /> 이백년(큰외종조부) <br /> 이만년(작은외종조부) <br /> [[이억년]](작은외종조부) <br /> [[이조년]](작은외종조부)<br /> 이포(외종숙) <br /> [[이인임]](외종육촌) <br /> [[조민수]](방계 외가친척)
|군복무 = [[고려]] 군사 <br/> [[조선]] 군사
|직업 = [[무관]]
|경력참전 = 합포 전투 <br /> 욕지도 전투 <br /> 함양 전투 <br /> 울주 전투 <br /> 청도 전투 <br /> 사주 전투 <br /> [[위화도 회군]]
|복무기간 = [[1376년]] ~ [[1392년]] [[음력 11월 2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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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의 중군총제사(中軍摠制使)가 되어 도총제사(都摠制使) 이성계의 병권장악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같은해에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어 개경의 내성(內城)을 축성하는 총책을 맡고, [[1392년]]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올라 시중 심덕부(沈德符)와 함께 각도의 관찰사(觀察使)를 파하고 안렴사(按廉使)를 두고, 절제사(節制使), 경력(經歷), 도사(都事)등을 파하고 장무록사(掌務錄事)를 두는 등 지방의 관제(官制)를 혁신하는 상소를 올려 이를 혁파(革罷)하고, 이어서 문하우시중(門下右侍中)이 되었다.
 
[[파일:Haposeong Site (합포성지) 01.jpg|섬네일|300px|1378년, 배극렴이 합포(현재의 창원시 마산회원구)에 쌓게 한 [[합포성지]]]]
=== 조선 건국 ===
1392년 7월 문하우시중으로 [[조준]](趙浚), [[정도전]]과 함께 [[고려 공양왕|공양왕]]을 폐하고<ref>《[[조선왕조실록]]》〈[[:s:태조강헌대왕실록/1년|태조강헌대왕실록/1년]]〉 “侍中裵克廉等白王大妃曰: “今王昏暗, 君道已失, 人心已去, 不可爲社稷生靈主, 請廢之。” 遂奉妃敎廢恭讓。”(시중 배극렴 등이 왕대비(王大妃)에게 아뢰었다. “지금 왕이 혼암(昏暗)하여 임금의 도리는 이미 없어지고 인심도 이미 떠나갔으므로, 사직과 생민(生民)의 주(主)가 될 수 없으니 그를 폐위하기를 청합니다.” 마침내 왕대비의 교지를 받들어 공양왕을 폐위하였다.) </ref> [[조선 태조|이성계]](李成桂)를 왕으로 추대하여 개국공신 1등이 되고 성산백(星山伯)에 봉해졌으며, 1천호(千戶)가 식읍(食邑)으로 내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