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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 진출과 개혁 활동: 성균대사성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늘여서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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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2년([[공민왕]] 1) 그의 학문의 경향과 정견(政見)의 윤곽을 피력한 의견서를 왕에게 제출하였고, 1353년(공민왕 2) 문과에 갑과(3등 이내)로 급제하였으며, 다시 정동행성 향시(鄕試)에 장원(1등)으로 합격되어 서장관에 임명된 뒤 원나라에 들어가 다시 문과에 급제, 한림 지제고(翰林知制誥)가 되었다.
 
귀국하여 내서사인에 올랐으며, 밀직제학 동지춘추관사가 되자 이로부터 국정에 참여하였다. 1367년(공민왕 16) 성균대사성이[[개성 성균관|성균관]] 대사성이 되었고, [[정몽주]]·[[김구용]] 등과 명륜당에서 학문을 강론하니 이에 정주(程朱)의 [[성리학]]이 처음으로 일어났다.
 
이후 그는 권문세족의 전횡을 비판하여 [[공민왕]]의 개혁 정책에 적극 협력하였다. 또한 [[불교]]의 대안으로 [[성리학]]을 새로운 개혁의 비전으로 제시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