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산 김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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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 김씨'''(善山 金氏)는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신라 시대대보공 [[김알지]](金閼智)의 후예로 [[고려]] 개국공신(開國功臣) 대광시중(大匡侍中) [[김선궁]](金宣弓)의 후손들이 [[선산읍|선산]]을 관향으로 하여 세계를 이루어 왔다. 그런데 [[원성왕]] 후예 좌복야(左僕射) [[김한충]]의 후손 화의군(和義君) '''김기'''(金起)가 고려말 [[선산읍|선산]]으로 낙향하면서 후손들이 [[선산읍|선산]]을 관향으로 하였다. 이들은 이조(異祖) 동본동성(同本同姓)이다.
 
이 둘을 구분하기 위해 [[김선궁]](金宣弓)을 시조로 하는 계통을 '''일선 김씨''', [[김한충]](金漢忠)을 시조로 하는 계통을 '''들성 김씨''' 불렀다. 일제시대 들어 [[김한충]] 계열 일부가 [[경순왕]] 8자 '''김추'''(金錘. 추정)를 시조로 소원시켜 분적 했다.<ref> [[1939년]] 일제시대에 선산 김씨 함경도 북종파 족보에 시조 '''김기'''를 [[경순왕]] 8자 '''김추'''(金錘)라는 가상의 인물을 선계로 둔갑시켰을 것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ref><ref> 그러나 김추 계열의 선산 김씨의 선계가 [[원성왕]]의 8세손 김유염과 그의 아들 [[김한충]]에서 비롯된비롯되었다는 것임을것이 다양한역사적 사료들이사료들에 나타내고 있다.</ref>
 
== 개요 ==
우리나라 성씨 가운데 조상이 서로 다른 데도 불구하고, 같은 지역에 뿌리를 두고 같은 성씨를 쓰며 마치 두 집안이 동성동본(同姓同本)인양 오인 받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선산 김씨'(善山 金氏)도 그중의 하나이다. 김선궁(金宣弓)계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김한충]](金漢忠)계는 남한 인구 조사에서는 파악되지 않고 있으며, 김추(金錘) 계열만 집계되고 있다.<ref>정복규의 한국 성씨를 찾아서-선산김씨(善山金氏)(일선 김선궁)[[http://www.shina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5584]]</ref><ref>정복규의 한국 성씨를 찾아서-선산김씨(善山金氏)(들성 김추계)[[http://www.shina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6715]]</ref><ref>"선산(일선)김씨분파[[http://www.surname.info/gim/seon_san1.html]]</ref>
 
이와 같이 선산 김씨가 이조(異祖) 동본동성(同本同姓)이 일어나게 된 것은 경북 [[선산읍|선산]](善山)에 뿌리를 두면서부터이다. 어느 한쪽 집안이 선산(善山)을 본관으로 사용하고 있었으며, 다른 한쪽은 [[선산읍|선산]] 고을의 옛 이름인 일선(一善)을 본관으로 사용하여 왔는데, 이후 지명이 지금의 [[선산읍|선산]]으로 바뀌어바뀌면서 본관을 선산(善山)으로 고치는 바람에 기존의 선산 김씨 집안과 혼동이 발생된 것이다.
 
== 김선궁(金宣弓) 계 ==
=== 역사 ===
시조 '''[[김선궁]]'''(金宣弓)은 고려고려조에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삼중대광 대광시중문하시중(三重大匡 門下侍中))·정난보국공신(靖難輔國功臣)에 책록 되고,지내고 선주백(善州伯)에 봉해졌다. 시호는 순충공(順忠公)의 시호를 받았다. 혹칭 '''일선 김씨'''(一善 金氏)라 한다이다.<ref>스스로 신라 대보공 [[김알지]]의 30세손이며, 제46대 [[문성왕]]의 후손이라 한다.</ref>
 
문헌에 의하면 [[고려 태조]]가 백제를 정벌할 때 숭선(嵩善. 지금의 경북 [[선산읍|선산구미시]]) 지방 전투에 병사를 모집함에 '''김선궁'''(金宣弓)이 고을 아전(衙前)으로써 응모하니, [[고려 태조]]는 자신이 쓰던 활 어궁(御弓)을 하사하고 이름도 선궁(宣弓)이라 지어 주었다. 전쟁에서 공을 세워 시중(侍中)에 오르고 식읍을 지급받았다. 아들 김봉문(金奉文)은 [[선산읍|선산]](善山)에서 아버지 뒤를 이어 좌윤(左尹)으로 아전이 되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관향을 [[선산읍|선산]](善山)의 옛 이름인 일선(一善)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다가, [[조선 태종]] 때 [[선산]]으로 개칭됨에 따라 본관을 [[선산읍|선산]](善山)으로 개관(改貫)하였다. 혹칭 '''선산일선 김씨'''( 金氏) 개관(改貫)하였다한다.<ref>외지에서는 '''선산 김씨'''로 통용되지만, [[선산읍|선산]]에서는 아직도 [[김선궁]](金宣弓) 계통을 '''일선 김씨'''라 한다.하고, [[경순왕]]의 아들아들이라는 '김추'(金錘) 계통을계열을 '''들성 김씨'''라 하여 구분 한다.</ref>
 
〈순충공 신도비명〉(順忠公 神道碑銘)에 처음 적(籍)을 일선(一善, 선산의[[선산읍|선산]]의 옛 이름)에 두어 세계(世系)를 이어 왔으나, [[조선 태종]] 때 지명이 선산(善山)으로 개칭됨에 따라 관향을 [[선산읍|선산]](善山)으로 하였다고 한다하였다.<ref>선산김씨 김선궁(金宣弓)계 [[http://www.shinjongwoo.co.kr/html/search.html {{웨이백|url=http://www.shinjongwoo.co.kr/html/search.html |date=20060628051932 }}]]</ref>
 
14세 '''김제'''(金齊)는 [[고려]] 조봉랑 지평해군사로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군청벽에 도해 벽상시 27자를 남기고 바다로 들어갔다. 이조참의에 증직되고 시호가 충개공이며 안동 고죽서원, 고창 운곡서원, 울진 운암서원에 배향 되었다.
 
呼船東問魯連津(호선동문노연진) 배를 불러 동쪽 노중련의 나루를 물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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願隨紅日照中 垠(원수호일조중은) 붉은 해를 따라가 님 계신곳 비추리.
 
14세 '''김주'''(金澍)는 김제(金齊) 아우로 고려조에 등과하여 벼슬이 예의판서로 하절사로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조선이[[조선]]이 개국하여개국하자 서신과 의복을 아내에게 보내고 돌아오지 않았다. 선산 월암서원에 배향 되었다.
 
[[김선궁]]의 손자 '''김흥술'''(金興述)은 삼사우윤(三司右尹) 김봉문(金奉文)의 아들로, 호장(戶長)을 역임하고, 일파를 이루었다. 특히 김흥술의 13세손 [[김숙자 (1389년)|김숙자]](金叔滋)와 그의 아들 [[김종직]](金宗直)은 가문을 빛낸 인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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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한충(金漢忠) 계 ==
=== 역사 ===
시조 '''[[김한충]]'''(金漢忠)은 신라 대보공 [[김알지]]의 후예로, [[원성왕]](元聖王)의 9세손이라 한다. 아버지 삼중대광(三重大匡) 김유렴(金庾廉)이 [[경순왕]](敬順王)을 따라 [[고려 태조]](太祖)에게 귀부하여 공신이 되었다. 벼슬이고려조에 좌복야(左僕射)였으며를 역임하고 원평공(元平公)의 시호를 받았다.<ref> 스스로 시조 '김한충'은 [[원성왕]] 9세손이라 한다.</ref> [[경순왕]]을 따라 [[고려 태조]]에게 귀순하여 공신이 된 김유렴(金庾廉)의 고손이다.<ref>《고려사》에는 김유렴(金庾廉)이 고조부라 하는데, 《증보문헌비고》 및 《조선씨족통보》에는등의 문헌에는 아버지라 한다.</ref>
 
문과에 급제한 여러 차례 승진하여 [[1087년]](선종 4) 합문인진사(閤門引進使) 상경차도위(上輕車都尉)가 되어 요나라에 다녀오고, 이어 형부시랑·예부상서를 거쳐 추밀원사·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역임하였다. [[1097년]](숙종 2) 동북면병마사로 덕원(德源) 지방을 노략질 하던 여진을 토벌하여 공을 세우고, [[1107년]](예종 3 윤관(尹瓘)이 여진을 정벌할 때 중군병마사(中軍兵馬使)로 출정하여 공을 세웠다.<ref>국역 《고려명신전》(2004, 남공철 저, 김동주 역, 성남 문화원 발행)</ref>
 
[[김한충]]은 고위 관직에 이르렀지만, 그의 부인이 [[고려 문종|문종]](文宗) 비첩의 딸이었으므로 대성(臺省)에는 들어갈같은 청요직에는 없었다취임하지 못하였다. 아들 김경초(金景初)·김경원(金景元)·김경약(金景若)을 두었다.<ref>《고려사》</ref> 현재 [[김한충]](金漢忠)을 시조로 하는 계통은 남한 인구 조사에서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 선계에 대해 ===
선산 김씨(일선) 대동보 경오보(庚午譜)에 의하면 판서공 김원로의 사위 '''김기'''(金起)에 대해 경주인(慶州仁)이며, [[고려(高麗)]] 추밀사(樞密司) [[김한충]](金漢忠)의 후예후예의 자손(子孫)으로 [[선산읍|선산]](善山)으로 개본(改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김기'''(金起)의 후손 김취문(金就文. 1509 ∼ 1570)은 호가 구암(久菴)으로, 청백리에 선정되고 강원도 관찰사 대사간을 역임하였는데, 그의 저서《구암집》에 선산 김씨(들성)의 먼 조상의 휘가 [[김한충|한충]](漢忠)이라 하였다. 즉 [[원성왕]] 9세손 [[김한충]](金漢忠)의 후손이라 한다.
 
=== 가족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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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녀 : 수주최씨(水州崔氏) 최정(崔精)에게 출가<ref>최정(崔精) 묘지명(墓誌銘)</ref> - 최사위(崔士威) 증손
 
=== 김추(金錘) 계-(추정) ===
==== 역사 ====
시조 '''김추'''(金錘)는 [[경순왕]]과 [[고려 태조]]의 맏딸인 [[낙랑공주 (고려)|낙랑공주 왕씨]] 소생의 8자로 상서령(尙書令)을 지내고 일선군(一善君)에 봉해졌다고 한다.<ref>[[1784년]] 발견되었다는 《김은열 묘지명》 원문에는 8자가 '''김종'''(金鐘)이라 하였다.</ref><ref>선산김씨 김추(金錘)계[[http://www.shinjongwoo.co.kr/html/search.html {{웨이백|url=http://www.shinjongwoo.co.kr/html/search.html |date=20060628051932 }}]]</ref> 혹칭 '''들성(평성) 김씨'''(坪城 金氏) 라고도 한다.
 
이후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말 화의군(和義君) '''김기'''(金起)를 1세조(世祖)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그는 중서령 '김성원'(金成元)의 아들로 [[고려]]말 출사하여 광주목사(廣州牧使)를 역임하고 화의군(和義君)에 봉해졌다. 기울어져 가는 [[고려]]의 사직을 개탄하여 관직을 버리고 불사이군(不事二君) 정신으로 낙향하여 [[선산군]] [[옥성면]] 포상동(浦上洞) 하송산(下松山) 아래에 터를 잡고 살다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화의(和義)는 [[선산읍|선산]](善山)의 별호인 관계로 후손들이 본관을 [[선산읍|선산]](善山)으로 하였다.
 
후손들이 번성하면서 비좁은 골짜기를 벗어나 청룡산과 당산 줄기가 사방 20리나 병풍처럼 둘러싸인 남쪽 들판으로 옮겨 '''들성'''(坪城)이라 명하고 정착하여 500여년 세거지로 명성을 드높였다.<ref>들성(坪城)은 오늘날의 [[경북]] [[구미시]] [[고아면]] 원호동(元湖洞)이다.</ref>혹칭 '''들성(평성) 김씨'''(坪城 金氏) 라고도 한다.
 
===== 선계에 대해 =====
현손 이조참판 '김광좌'(金匡佐)가 여섯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문장과 덕행이 뛰어나 세인의 추중(推重)을 받았으며, 이후 6파(派)로 나뉘어 졌다.
 
==== 선계에 대해 ====
후손 '''김취문'''(金就文. 1509 ∼ 1570)은 호가 구암(久菴)으로 청백리에 선정되고 강원도 관찰사 대사간을 역임하였는데 그의 저서 《구암집》에 '''선산 김씨(들성)'''의 먼 조상의 휘가 [[김한충|한충]](漢忠)이라 하였다. 즉 [[원성왕]] 9세손 '''김한충'''(金漢忠)의 후손이라 하였다.
 
===== 시조에 대해 =====
최근들어 시조가 [[경순왕]]의 8자 일선군(一善君) '''김추'''(金錘)라 하는데, 조선 후기 [[1784년]] 개성 어느 산기슭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는 《김은열 묘지명》 원문에는 [[경순왕]]의 8자를 '''김종'''(金鐘)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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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척 김씨]](三陟 金氏)도 시조 '''김위옹'''(金渭翁)의 아버지를 [[경순왕]]의 8자 삼척군(三陟君) '''김추'''(金錘)라 한다. 《증보문헌비고》·《조선씨족통보》등의 문헌에는 '''김추'''(金錘)를 시조로 하는 김씨(金氏)계는 보이지 않고 있다. 따라서 시조 '''김추'''(金錘)에 대해서는 각종 자료 및 견해가 난무하는 관계로 좀더 고증을 거쳐야 될 것으로 보인다.<ref>[[1939년]](소화 14) 경상북도 선산 김씨(善山 金氏) 대종회에서 발행한 선산 김씨(善山 金氏) 족보(族譜) 상권(上卷)에는 시조 1세를 '''김기'''(金起)로 하고 있으면서, 『단천족보(端川族譜)』 고전(考傳) 기록에 경북 선산 남종파(南宗派)에서 족보(族譜)를 편찬(編纂)할 때 함경북도 북종파(北宗派)에서 시조를 “신라(新羅) 경순대왕(敬順大王)의 제8남 김추(金錘)의 후손(後孫)이다.”라는 기록은 믿을 수 없다. 라면서 의심할 “의(疑)” 자를 기록해 놓았다.[三陟金氏와 善山金氏 貫祖에 대한 硏究 및 文獻의 考察 -各種 文獻 考證을 中心으로- 白松 金宰弘/三陟金氏譜學硏究會硏究委員] </ref>
 
==== 분파 ====
고려 말엽에 검교중랑장을 지낸 16세 '김문'(金文)은 슬하에 네 아들 [[김성원 (고려)|김성원]](金成元), 김성부(金成富), 김성룡(金成龍), 김성여(金成呂)를 파조로 하여 4대파로 분파하였다.
 
* '''중서령공파'''(中書令公派) : 파조 [[김성원 (고려)|김성원]](金成元)은 고려조 서운관정(書雲觀正)과 중서령(中書省)을 지냈다. 그의 아들 '김기'(金起)는 광주목사(廣州牧使)를 지내고 화의군(和義君)에 봉해졌다. 조선이 개국되자 불사이군 정신으로 [[구미시|선산]](善山)에 내려와 고려 유신으로 절의를 지켰다. 화의(和義)는 [[구미시|선산]](善山)의 별호이다.<ref>김기(金起)의 현손 이조참판 김광좌(金匡佐)가 여섯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문장과 덕행이 뛰어나 세인의 추중(推重)을 받았다. 이후 6개 지파로 분파되었다.</ref>
 
* '''판서공파'''(判書公派) : 파조 '김성부'(金成富)는 고려조 전의부정(典醫副正)을 지내고, 조선개국 원종공신으로 호조 판서에 이르렀다. 그의 장자 김경도(金敬道)는 조산대부로 밀양교수를, 차자 김경적(金敬迪)은 강화교수를 지냈다. 그 후손들은 [[함경도]] 단천 고읍을 중심으로 길주, 성진, 이원, 풍산, 북청, 홍원 등에 세거(世居)하였다.
 
* '''좌의정공파'''(左議正公派) : 파조 [[김성룡]](金成龍)은 고려말 산원동정(散員同正)을 지냈고, 조선개국 원종공신으로 대광보국 숭록대부 좌의정에 이르고 화의부원군(和義府院君)에 봉해졌다. 그의 아들 김탁(金逴)은 병조참의, 증손 김정신(金鼎臣)은 안동도호부사를 지냈다. 후손들은 [[경기도]] 이천등에 세거(世居)하였다.
 
* '''별장공파'''(別將公派) : 파조 '김성여'(金成呂)는 고려말 별장동정(別將同正)을 지냈다. 그의 아들 김선(金選), 손자 김요신(堯臣), 김순신(金舜臣)등의 행적은 알지 못하고, 후손들이 평안도에[[평안도]]에 세거(世居)하였다.
 
===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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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인선(金印宣) : 집현전 태학사
* 김성원(金成元) : 서운관정, 중서령(中書令)에 추증
* '''김기'''(金起) : 중서령 김성원의 아들, 고려 말에 등제하여 정순대부 광주목사(廣州牧使)에 이르렀으며 화의군(和義君)에 봉해졌다. 고려가 망하자 슬퍼하며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節義)를 지켜 선산(善山)에 은거(隱居) 종신(終身)하였다. * 김성부(金成富) : 전의부정(典醫副正)
* 김성부(金成富) : 전의부정(典醫副正)
* 김성룡(金成龍) : 산원동정(散員同正)
* 김성여(金成呂) : 별장동정(別將同正), 평안도 정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