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산 김씨: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
|||
13번째 줄:
'''선산 김씨'''(善山 金氏)는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신라 대보공 [[김알지]](金閼智)의 후예로 [[고려]]
이 둘을 구분하기 위해 [[김선궁]](金宣弓)을 시조로 하는 계통을 '''일선 김씨''', [[김한충]](金漢忠)을 시조로 하는 계통을 '''들성 김씨'''라 불렀다. 일제시대 들어 [[김한충]] 계열 일부가 [[경순왕]] 8자 '''김추'''(金錘. 추정)를 시조로 소원시켜 분적 했다.<ref> [[1939년]] 일제시대에 선산 김씨 함경도 북종파 족보에 시조 '''김기'''를 [[경순왕]] 8자 '''김추'''(金錘)라는 가상의 인물을 선계로 둔갑시켰을 것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그러나 김추 계열의 선산 김씨의 선계가 [[원성왕]]의 8세손 김유염과 그의 아들 [[김한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역사적 사료들에 나타내고 있다.</ref>▼
== 개요 ==
우리나라 성씨 가운데 조상이 서로 다른 데도 불구하고, 같은 지역에 뿌리를 두고 같은 성씨를 쓰며 마치 두 집안이 동성동본(同姓同本)인양 오인 받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이 둘을 구분하기 위해 [[김선궁]](金宣弓)
이와 같이 선산 김씨가 이조(異祖) 동본동성(同本同姓)이 일어나게 된 것은 경북 [[선산읍|선산]](善山)에 뿌리를 두면서부터이다. [[선산읍|선산]] 고을의 옛 이름인 일선(一善)을 본관으로 사용하여 왔는데, 이후 지명이 지금의 [[선산읍|선산]]으로 바뀌면서 본관을 선산(善山)으로 고치는 바람에 혼동이 발생된 것이다.▼
▲이와 같이 선산 김씨가 이조(異祖) 동본동성(同本同姓)이 일어나게 된 것은
== 김선궁(金宣弓) 계 ==
=== 역사 ===
시조 '''[[김선궁]]'''(金宣弓)은 초명이 김선(金宣)이며, 고려조에 삼중대광 문하시중(三重大匡 門下侍中)을 지내고 대승(大丞)에 추증되었다. 선주백(善州伯)에
문헌에 의하면 [[고려 태조]]가 백제를 정벌할 때 숭선(嵩善. 지금의 경북 [[구미시]]) 지방 전투에 병사를 모집함에
그리하여 후손들이 관향을 [[선산읍|선산]](善山)의 옛 이름인 일선(一善)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다가, [[조선 태종]] 때 [[선산]]으로 개칭됨에 따라 본관을 [[선산읍|선산]](善山)으로
14세 '''김제'''(金齊)는 [[고려]] 조봉랑 지평해군사로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군청벽에 도해 벽상시 27자를 남기고 바다로 들어갔다. 이조참의에 증직되고 시호가 충개공이며 안동 고죽서원, 고창 운곡서원, 울진 운암서원에 배향 되었다.
呼船東問魯連津(호선동문노연진) 배를 불러 동쪽 노중련의 나루를 물으니,
五百年今一介臣(오백년금일개신) 오백년 고려조의 한사람 신하로다.
可使孤魂能不死(가사고혼능불사) 외로운 이 영혼이 죽지 않고 남는다면,
願隨紅日照中
14세 '''김주'''(金澍)는 김제(金齊) 아우로 고려조에 등과하여 벼슬이 예의판서로 하절사로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조선]]이 개국하자 서신과 의복을 아내에게 보내고 돌아오지 않았다. 선산 월암서원에 배향 되었다.
[[김선궁]]의 손자 '''김흥술'''(金興述)은 삼사우윤(三司右尹) 김봉문(金奉文)의 아들로, 호장(戶長)을 역임하고
[[김숙자 (1389년)|김숙자]](金淑滋)는 야은(冶隱) [[길재]](吉再)로부터 조선 [[성리학]]의 정통을 이어 받았으며,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 등을 역임하고, 낙향해서는 조선 [[성리학]] 발전에 큰 업적을 쌓았다. 낙봉서원에 배향되었다.
137번째 줄:
== 김한충(金漢忠) 계 ==
=== 역사 ===
시조 '''[[김한충]]'''(金漢忠)은 신라 대보공 [[김알지]]의 후예로 고려조에 좌복야(左僕射)를 역임하고 원평공(元平公)의 시호를 받았다.<ref> 후손들 스스로 시조
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차례 승진하여 [[1087년]](선종 4) 합문인진사(閤門引進使) 상경차도위(上輕車都尉)가 되어 요나라에 다녀오고, 이어 형부시랑·예부상서를 거쳐 추밀원사·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역임하였다. [[1097년]](숙종 2) 동북면병마사로 덕원(德源) 지방을 노략질 하던 여진을 토벌하여 공을 세우고, [[1107년]](예종 3 윤관(尹瓘)이 여진을 정벌할 때 중군병마사(中軍兵馬使)로 출정하여 공을 세웠다.<ref>국역 《고려명신전》(2004, 남공철 저, 김동주 역, 성남 문화원 발행)</ref>
153번째 줄:
=== 선계에 대해 ===
[[김선궁]]계 선산 김씨(일선) 대동보 경오보(庚午譜)에 의하면 판서공 김원로의 사위 '''김기'''(金起)
'''김기'''(金起)의 후손 김취문(金就文. 1509 ∼ 1570)은 호가 구암(久菴)으로 청백리에 선정되고 강원도 관찰사 대사간을 역임하였는데, 그의 저서《구암집》에 선산 김씨(들성)의 먼 조상의 휘가 [[김한충|한충]](漢忠)이라 하였다. 즉 [[원성왕]] 9세손 [[김한충]](金漢忠)의 후손이라 한다.
159번째 줄:
== 김추(金錘) 계 (추정) ==
=== 역사 ===
시조 '''김추'''(金錘)는 [[경순왕]]과 [[고려 태조]]의 맏딸인 [[낙랑공주 (고려)|낙랑공주 왕씨]] 소생의 8자로 상서령(尙書令)을 지내고 일선군(一善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이후 세계가 실전되고 후손 [[고려]]말 화의군(和義君) '''김기'''(金起)를 1세조(世祖)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그는 중서령 '김성원'(金成元)의 아들로 [[고려]]말 출사하여 광주목사(廣州牧使)를 역임하고 화의군(和義君)에 봉해졌다. 기울어져 가는 [[고려]]의 사직을 개탄하여 관직을 버리고 불사이군(不事二君) 정신으로 낙향하여 [[선산군]] [[옥성면]] 포상동(浦上洞) 하송산(下松山) 아래에 터를 잡고 살다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화의(和義)는 [[선산읍|선산]](善山)의 별호인 관계로 후손들이 본관을 [[선산읍|선산]](善山)으로 하였다.
166번째 줄:
=== 선계에 대해 ===
후손 '''김취문'''(金就文. 1509 ∼ 1570)은 호가 구암(久菴)으로 청백리에 선정되고 강원도 관찰사 대사간을 역임하였는데 그의 저서 《구암집》에 '''선산 김씨(들성)'''의 먼 조상의 휘가 [[김한충|한충]](漢忠)이라 하였다. 즉 [[원성왕]] 9세손
=== 시조에 대해 ===
최근들어 시조가 [[경순왕]]의 8자 일선군(一善君) '''김추'''(金錘)라 하는데, 조선 후기 [[1784년]] 개성 어느 산기슭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는 《김은열 묘지명》 원문에는 [[경순왕]]의
이후 [[경주 김씨]] 일문 족보류에
☞ [[삼척 김씨]](三陟 金氏)도 시조 '''김위옹'''(金渭翁)의 아버지를 [[경순왕]]의 8자 삼척군(三陟君) '''김추'''(金錘)라 한다. 《증보문헌비고》·《조선씨족통보》등의 문헌에는 '''김추'''(金錘)를 시조로 하는 김씨(金氏)계는 보이지 않고 있다. 따라서 시조 '''김추'''(金錘)에 대해서는 각종 자료 및 견해가 난무하는 관계로 좀더 고증을 거쳐야 될 것으로 보인다.<ref>[[1939년]](소화 14) 경상북도 선산 김씨(善山 金氏) 대종회에서 발행한 선산 김씨(善山 金氏) 족보(族譜) 상권(上卷)에는 시조 1세를 '''김기'''(金起)로 하고 있으면서, 『단천족보(端川族譜)』 고전(考傳) 기록에 경북 선산 남종파(南宗派)에서 족보(族譜)를 편찬(編纂)할 때 함경북도 북종파(北宗派)에서 시조를 “신라(新羅) 경순대왕(敬順大王)의 제8남 김추(金錘)의 후손(後孫)이다.”라는 기록은 믿을 수 없다. 라면서 의심할 “의(疑)” 자를 기록해 놓았다.[三陟金氏와 善山金氏 貫祖에 대한 硏究 및 文獻의 考察 -各種 文獻 考證을 中心으로- 白松 金宰弘/三陟金氏譜學硏究會硏究委員] </ref>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