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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협회에 모인 민중들”로 알려진 해당 사진은 독립협회가 아닌 일진회1907년 4월 21일경 독립관(옛 모화관)·국민연설대에서 주최한 ‘국민연설회’에 참석한 군중의 모습. 관련 기사인 [http://www.newstof.com/news/articleView.html?idxno=10058]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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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은 그해 이어 [[7월 2일]], 내부적으로는 민중 스스로 인권과 [[참정권]]을 주장하게 하고, 대외적으로는 자주국을 표방, [[독립문]] 건립과 독립공원 조성을 목적으로 독립협회를 창설하였다. 독립협회의 참여자 수가 늘면서 각지의 백성들이 참여하는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였고, 학생들에게 토론과 타협을 가르치는 [[협성회]]를 산하 기관으로 조직, 후원하였다.
 
고종의 환궁을 성사시켰고, [[1896년]] [[11월]]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독립문]]을 세웠으며, 그 옆에 있던 [[모화관]](慕華館)을 독립관으로 개칭하였다. [[1897년]]부터는 종로에서 각계각층이 참가한 [[만민공동회]]를 열어 국민들의 애국심을 높였다. [[1898년]] [[10월]] [[한성부]] 종로 네거리에서 [[만민공동회관민공동회]]를 조직, 시국에 관한 6개 조의 개혁 안을 고종에게 건의하는 것을 시작으로 적극적인 혁신운동을 전개하였다. [[1898년]] [[11월]] 정부의 외곽단체인 [[황국협회]] 등의 무고로 [[이상재]], [[남궁억]] 등 독립협회 간부 17명이 검거 투옥되고, [[황국협회]]의 사주를 받은 천여 명의 보부상들이 독립협회를 습격했다. [[대한제국 고종|고종]]은 칙령으로 양회 해산을 명령하였다. 한국 최초의 근대적인 사회정치단체로 [[민권]]과 [[참정권]]을 주장하던 [[서재필]] 등의 [[개화파]]와 [[정부]]의 외세 의존 정책에 반대하는 지식층 등이 참여하여 [[조선]]의 자주독립과 민권, [[민중]]의 [[참정권|정치 참여]], 내정[[개혁]] 등을 주장하고 활동하였다.
 
== 설립 배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