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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Baptism - Marcellinus and Peter.jpg|섬네일|초기 기독교 예술에서의 침례.]]
[[파일:세례식.jpg|섬네일|대한민국 개신교회에서 이루어진 세례식의 예]]
'''세례'''(洗禮) 또는 '''세례 성사'''(洗禮聖事)는 [[물]]을 이용하는 정화의식이다. 세례는 [[기독교]], [[만다야교]], [[시크교]]를 포함하여 여러 [[종교]]에서 행해진다. 기독교의 세례는 [[유대교]]의 의식인 [[미크바]]에 기원을 두고 있다. 기독교적으로는 헬라 원어를 고려했을 때, 세례가 아닌 침례라는 표현으로 사용되어져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 역사 ==
'''세례'''는 물에 잠김으로써 이뤄지는 유대인의 정화 의식 '[[트빌라]]'와 유사하다. 두 예식 모두 각 종교로의 개종과 귀의의 의미를 갖고 있는 점이 동일하나 유대교의 세례는 반복적으로 이뤄질 수 있는 반면 '''세례'''는 원칙적으로 일평생에 단 한 번만 받을 수 있다(사실 "세례"에 대한 현대 히브리어 용어는 "기독교의 [[트빌라]]"이다). 그리고 기독교의 선구자로 여겨지는 세례 요한은 '''세례'''를 그가 수행한 메시아 운동의 중심적인 성례로 사용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요한의 세례 (“회개의 세례”)와 예수의 이름으로 이뤄지는 세례를 구분했기에 혹자는 그리스도교의 '''세례'''가 어떤 면에서 요한의 세례와 ​​관련이 있었는지는 의심스럽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반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세례'''와 성찬식을 직접 제정했다고 믿는다.
 
초대 교회에서 어떤 형태의 침수가 가장 일반적인 세례 방법이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초대 교회의 많은 사료들은 '''세례'''의 구체적인 방식 자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했다. 그래서 [[디다케]] 7.1–3 (AD 60–150년)는 예식에 집중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라면 약식으로 세례를 주는 관행까지도 허용했다. 마찬가지로, [[테르툴리아누스]] (AD 196-212년)는 침례에 대한 접근 방식이 성서적이지 못하거나 전통과 다르더라도 다양한 접근법을 허용했다. (참조, De corona militis 3; De baptismo 17). 마지막으로, [[키프리아누스]] (Cyprian) (약 AD 256년)는 세례에 사용되는 물의 양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며 다만 세례 예식 안에서의 침수 여부와 세례자의 복장, 비방 관행의 중요성은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 결과, 4세기 이전의 고대 교회에는 합의되어 정해진 일관성 있는 침례 양식이 존재하지 않았다.
 
세례 예식은 3세기와 4세기를 지나며 교리 교육, 교화, 퇴폐, 안수, 신조 암송이 포함되었다.
 
중세 초기에는 유아 세례가 보편적으로 전파됐으며 예식은 크게 단순화되었다. 서유럽에서는 12세기에서 14세기 사이부터 물을 뿌려서 약식으로 행하는 '''세례'''가 일반적인 방식으로 자리 잡았지만, 여전히 16세기까지도 침수를 통해 이뤄지는 침례 예식이 병행되었다. 한편 중세 시대, 일부 급진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세례와 성찬을 거절하기도 했다. 16세기에 [[마틴 루터]]는 세례와 성찬을 성례로서 중요시하여 지켰지만 스위스의 종교 개혁자 [[울리히 츠빙글리]]는 침례와 주의 만찬을 단지 상징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추가적으로 재세례파는 유년기에 자유 의지와 무관하게 행해진 유아 세례의 타당성을 부인하고 재세례를 받은 개종자들을 가리킨다.
 
== 기독교의 세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