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선진리성: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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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선진리성'''(泗川船津里城)은 [[경상남도]]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에 있는 [[정유재란]] 때 [[일본군]](倭軍)이 쌓은 [[일본]]식 [[성 (건축)|성곽]]([[왜성 (건축)|왜성]])이다. [[일제 강점기|일제강점기]]때 [[1936년]] [[5월]]에는 고적 제81호로 지정됐으며, 그 후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50호로 지정되었으나 왜성이라는 이유로 1998년 9월 8일 [[경상남도의 문화재자료]] 제274호로 격하되었다. 두 차례의 시·발굴조사에서 왜성의 성벽(석원)이 확인되었으며, 500×600cm의 북곽이 딸린 ‘ㄱ’자 형태의 천수각과 폭 150cm의 문설주가 설치된 왜성 문지(호구), 주거지 2기, 수혈 70여기가 조사되었는데 목책열로 추정된다. 출토유물은 와편이 주류를 이루고 문양은 무문양, 사격자문, 복합문, 어골문 등이 시문되어 있다.
 
== 현지 안내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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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사천선진리성은 사천읍에서 약 7km 서남쪽에 위치한 평산성이다. 바다와 가까운 지리적 이점 때문에 고려 시대부터 조창이 설치되어 주변에 토성을 쌓았다.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조창 터에 왜성을 쌓아 주둔하였고, 뒤이어 정유재란 때 성주변에서 일본군과 조명연합군의 큰 싸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성 주변은 선진공원으로 정비되었고, 일부는 농지로 변해있다. 두 차례의 시·발굴조사에서 왜성의 성벽(석원)이 확인되었으며, 500×600cm의 북곽이 딸린 ‘ㄱ’자 형태의 천수각과 폭 150cm의 문설주가 설치된 왜성 문지(호구), 주거지 2기, 수혈 70여기가 조사되었는데 목책열로 추정된다. 출토유물은 와편이 주류를 이루고 문양은 무문양, 사격자문, 복합문, 어골문 등이 시문되어 있다.
 
== 역사 ==
[[고려 시대]] 초기 남도수군의 조창중 하나인 통양창(通陽倉)이 있어 이 지역은 통양포 또는 통조포로 불렸으며 조창을 방어하기 주변에 토성을 쌓았다. * [[조선 시대]]에 들어서면 통조포로 지명이 굳어졌고, 조창은 통양창(通洋倉)으로 개명되었다. [[조선 태종|태종]] 3년([[1403년]]) 통양창에 [[왜구]]가 출몰하자 조세운송은 해로에서 육로로 바뀌었으며 통양창의 역할은 축소되었다.<ref name="h">[http://www.gntour.com/servlet/SearchServlet?command=search.brief&pageNum=10&dbList=63&dbNo=1&kwStr=%BC%B1%C1%F8%B8%AE%BC%BA&dbStr=&cmpStr=&expMode=0&searchMode=0&sortFld=&sortMode=0 경남관광길잡이]{{깨진 링크|url=http://www.gntour.com/servlet/SearchServlet?command=search.brief&pageNum=10&dbList=63&dbNo=1&kwStr=%BC%B1%C1%F8%B8%AE%BC%BA&dbStr=&cmpStr=&expMode=0&searchMode=0&sortFld=&sortMode=0 }} 사천선진리성 2008년 12월 13일 확인</ref>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일본군 장수 [[모리 가쓰노부|모리 요시나리]]는 토성 주변에 [[왜성 (건축)|왜성]]을 쌓았고, [[시마즈 요시히로|요시히로]], [[시마즈 다다쓰네|다다쓰네]] 부자가 성의 수비를 맡았다. 이 사천선진리성 에서는 임진왜란 때 두 번의 전투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선조]] 25년([[1592년]]) 사천 앞바다에서 벌어진 제2차 [[사천해전]]이었다. 이 전투에서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적선 13척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또 하나는 선조 31년([[1598년]]) [[동일원]]이 이끄는 3만의 조명연합군이 전시 중 오발로 탄약궤가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하였고, 연합군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틈을 노려 시마즈 요시히로가 이끄는 8천의 일본군이 성을 나와 역습하였고, 연합군은 수많은 사상자내며 북으로 패주하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조명연합군 3만여 명을 전사시켰다 하나 [[조선왕조실록]]에는 7,8천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당시 조명연합군의 병력이 3만여 명임을 들어 아마 이전까지 전사한 조명연합군의 수를 포함한 것으로 보고 있다.<ref>[http://www.gntour.com/servlet/SearchServlet?command=search.brief&pageNum=10&dbList=63&dbNo=1&kwStr=%BC%B1%C1%F8%B8%AE%BC%BA&dbStr=&cmpStr=&expMode=0&searchMode=0&sortFld=&sortMode=0 경남관광길잡이]{{깨진 링크|url=http://www.gntour.com/servlet/SearchServlet?command=search.brief&pageNum=10&dbList=63&dbNo=1&kwStr=%BC%B1%C1%F8%B8%AE%BC%BA&dbStr=&cmpStr=&expMode=0&searchMode=0&sortFld=&sortMode=0 }} 조명군총 2008년 12월 13일 확인</ref>
 
이후 [[조선 숙종|숙종]] 때에 [[진보]]가 설치되어 수군이 주둔하였고, 해안을 방어하였다. 또, [[영조]] 36년([[1760년]]) 진주에 설치된 가산창의 방어 임무와 호위를 맡은 능노군, 포수, 화포수, 사궁으로 이루어진 군이 주둔하였다.<ref name = "h"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