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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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Joseph-Sifrède_Duplessis_001.jpg|thumb|right|240px|Gluck, detail of a portrait by [[Joseph Duplessis]], dated 1775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Christoph Willibald Gluck, [[1714년]] [[7월 2일]] ~ [[1787년]] [[11월 15일]])은 [[독일의 작곡가]]로 고전주의 시대에 중요한 작곡가 중 하나이며, 특히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로 유명하다.
 
그는 후원자였던 프랑스의 왕비인 마리 앙트와네트의 음악 교사로서도 유명하다. 일부에서는 글루크을 적어도 오페라에선 [[로코코]]와 [[고전주의]] 시대의 음악의 아버지로 여긴다. 글루크의 드라마적이지 못한 요소는 모두 배제한 오페라 개혁은 음악의 역사에서 큰 전환점이였다.
 
==일생==
== 초창기의 글루크 ==
글루크는 [[오페라 세리아]] 분야에서 18세기 최대의 작곡가라 하겠다. 1736년, [[빈]]에서 로브코비츠공(公)의 실내악 연주자가 되어 그 곳에서 이탈리아 오페라를 많이 들을 기회를 얻었으며, 또한 다음해 이탈리아에서 [[사마르티니]](G.B.Samartini, 1700-1775)에게서 가르침을 받아 최초의 오페라 <아르타세르세(Artaserse)>를 발표한 이후 이탈리아 오페라 작곡에 의욕을 갖게 되었다. 1752년부터는 빈을 중심으로 활약하여 그 무렵부터 프랑스 [[오페라 코미크]]의 영향을 받은 작품을 남겼다. 1761년부터는 대본작가 칼차비지(Ranieri Calzabigi)와 협력하여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알체스테 (글루크)|알체스테]](Alceste)> 등을 작곡하였으나 이탈리아의 [[오페라 부파]]의 인기에 눌려 별로 호평을 받지 못하였다. 1774년, <[[타우리스의 이피게네이아]]>가 파리에서 대성공을 거두고 프랑스 오페라풍으로 제작한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등이 그 뒤를 이었다. 당시 파리 오페라계에는 글루크를 미는 프랑스파와 피치니의 이탈리아파 사이에 대논쟁이 일어나 두 사람은 <[[타우리스의 이피게네이아]]>를 작곡하여 실력을 겨루었으나 결국 글루크의 실력이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글루크는 이처럼 이탈리아 오페라, 프랑스 오페라, 독일 오페라 등이 지니는 각 양식을 융합하여, 가수에 편중하는 오페라에서 '음악을 대본에 봉사케 하는 오페라'로의 개혁을 이룩하였다.
 
==글루크의 가극개혁==
글루크는 에라스바흐(현재 바이에른 지방, 베르힝 지역)에서 아홉 중 첫번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글루크가 공무원이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글루크는
1769년에 빈에서 출판된 <알체스테>의 [[악보]]에 글루크 오페라에 대한 새로운 이상이 명백히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그는 "시는 음악표현의 기초가 되며 음악은 시에 종속한다. 가수의 기교 과시나 필요 이상의 음악적 장식을 가능한 한 배제하여 단순한 기법을 쓸 것. 서곡을 극 전체의 분위기와 밀접하게 관계지을 것" 등을 강조하고 있다.
 
==대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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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체스테 (글루크)|알체스테]] 1767년, 개정판 1776년
* [[타우리스의 이피게네이아]] 1779년
 
==참고 자료==
*[[글로벌 세계대백과 사전]], 〈서양 음악의 역사〉
 
{{토막글|작곡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