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조약: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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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되자 일본은 전략을 바꾸어 조정 대신들을 상대로 위협·매수에 나섰다. [[하야시 곤스케]]는 [[11월 11일]] 외부대신 [[박제순]]을 일본 공사관으로 불러 조약 체결을 강박하고, 같은 시간 [[이토 히로부미]]는 모든 대신과 원로대신 [[심상훈]](沈相薰)을 그의 숙소로 불러 조약 체결에 찬성하도록 회유와 강압을 되풀이하였다.
 
일본은 1905년 11월 추밀원장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고종 위문 특파 대사 자격으로 파견하여 대한 제국의 보호국화를 위한 조약 체결에 나서게 된다. 이토 히로부미는 재차에 걸쳐 고종과 내각을 압박했으나 고종과 내각은 당연히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11월 17일 각부 대신들을 일본 공사관에 불러 한일 협약의 승인을 꾀하였으나 오후 3시가 되도록 결론을 얻지 못하자, 궁중에 들어가 어전 회의를 열게 했다. 어전 회의에서는 일본의 각종 압박에도 불구하고 역시 거부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러자 이토 히로부미는 주한 일군 사령관이었던 하세가와를 대동하고 헌병의 호위를 받고 들어와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의견을 물어보기 시작한다.
이러한 회유와 강압 끝에 다수의 지지를 얻게 된 [[이토 히로부미]]와 [[하야시 곤스케]]는 마침내 [[11월 17일]] [[경운궁]]에서 어전회의를 열도록 했다. 그러나 회의는 침통한 공기만 감돌았을 뿐 아무런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고종은 강압에 의한 조약 체결을 피할 목적으로 의견의 개진 없이 대신들에게 결정을 위임한 상태였다. 어전회의가 5시간이 지나도록 결론에 이르지 않자 초조해진 [[이토 히로부미]]는 하세가와 군사령관과 헌병대장을 대동하고 일본헌병 수십 명의 호위를 받으며 궐내로 들어가 노골적으로 위협과 공갈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참정 대신 한규설과 탁지부 대신 민영기는 반대했지만, 법부 대신 이하영은 소극적 반대, 학부 대신 [[이완용]]과 군부 대신 [[이근택]], 내부 대신 [[이지용]], 외부 대신 [[박제순]], 농상공부 대신 [[권중현]]이 찬성을 하면서 을사 조약은 승인받게 된다. 서명은 다음날인 18일 새벽 1시에서 2시 사이에 이루어졌다.
 
[[이토 히로부미]]는 직접 메모용지에 연필을 들고 대신들에게 가부(可否)를 따져 물었다. 그때 갑자기 한규설 참정대신이 소리 높여 통곡하기 시작했던지라 별실로 데리고 갔는데, 이토 히로부미가 “너무 떼를 쓰거든 죽여 버리라.”라고 고함을 쳤다.<ref name="망언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