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시프 스탈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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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4월에 스탈린은 [[볼셰비키]] 중앙위원회의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때 [[임시정부]]에 의해 체포령이 내린 [[레닌]]이 해외로 도피하는 것을 돕기도 하고, 유혈극을 피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 포위된 볼셰비키 당원들에게 항복할 것을 명령하기도 했다. [[레닌]]은 [[핀란드]]로 피신시키고 스탈린은 혁명의 혼란기에 일시적으로 숨어 있었다. [[1917년]] [[3월 25일]]<ref>[[율리우스력]]으로는 [[3월 12일]]</ref> [[시베리아]]에서 [[페트로그라드]]로 온 스탈린은 [[프라우다]]의 편집 책임을 다시 맡았다.
 
스탈린은 [[레닌]]이 없는 [[볼셰비키]] 당을 지도하면서 위태로운 순간을 넘겼으며, 불안정한 권력을 승계한 중산층 자유주의자들의 임시정부에 볼셰비키가 협조할 것을 주장했다.<ref name="daum1"/> 그러나 [[레닌]]의 영향을 받아 스탈린은 임시정부에 대한 협조적 의사를 번복, 볼셰비키당이 무력으로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보다 호전적인 생각으로 정책을 전환했다. 한편 스탈린은 제정의 압력을 피해 [[핀란드]]에 출국중이었던 [[블라디미르 레닌|레닌]]의 귀환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결국 돌아오게 하였다.

한편 10월 임시정부는 [[독일]]군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위협하자 체포되었던 [[볼셰비키]] 당원을 석방시켜 방위전에 참가시키려고 하였다. [[볼셰비키]]는 이를 이용하여 임시정부를 전복할 혁명을 꾸몄다. [[레닌]], [[레프 트로츠키]], 스탈린을 비롯한 [[볼셰비키]] 중앙위원회는 스모르니 [[학원]]에서 열린 회의에서 이를 가결하였고 [[11월 7일]]([[율리우스력]]으로는 [[10월 25일]]) [[케렌스키]]가 전선을 방문한 틈을 이용하여 실행에 옮겼다. ([[10월 혁명]]) 이는 별다른 희생 없이 성공했고, [[11월 8일]] [[임시정부]] 각료들은 모두 체포되었다.
 
[[1917년]] 11월 당시, [[11월 혁명]]이 일어났을 때 스탈린은 열성적으로 참여하여 활동했지만, [[레프 트로츠키]]의 역할만큼 눈에 띄지 못했다. [[레프 트로츠키|트로츠키]]는 이후 그의 최대 라이벌로 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