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원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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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직할시|서경]]에서 [[묘청의 난]]이 발생하였을 때 임원후는 [[김부식]]과 [[중군수]]에 임명되었다가 얼마뒤 도성에 머물러서 왕을 보위하도록 하였다. 그 뒤 동덕좌리공신에 책봉되었고 [[개부의동삼사]] [[검교]] [[태부]]직에 올랐고, 판병부사가 되었다. [[문하시랑]] [[평장사]]에 임명되었을 때 [[최주]]에게 자리를 양보하였으나 인종은 허락하지 않았다.<ref name=autogenerated1 />
 
판이부사로 있을때는 관리를 선발하는 인사임명을 매우 공정하게 처리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1 /> 그 뒤 수태부[[수태보]] 판서경유수사로 부임했다.
 
외손자 [[고려 의종|의종]]이 즉위하자 [[문하시중]]에 임명되고 정안후(定安侯)의 작위를 받았으며 특별히 대우를 받아 조회할 때는 궁전 위에 올라서서 배례하는 특전을 받았는데, 간관들이 그에 대해 지나친 일이라고 비판하였다. 의종에 의해 선충안사좌리동덕[[공신]]에 책봉되고 삼중대광 개부의동삼사 수태위 상주국으로 승진 임명되었으며, 작위도 정안후에서 정안공으로 높여졌으며 식읍 2천호와 석실봉 6백호를 받았으며 관할 부를 설치하여 [[수령부]](壽寧府)를 설치하고 그 부의 속료를 받도록 하였다. 68세로 사망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