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 (성씨):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잔글편집 요약 없음
편집 요약 없음
18번째 줄:
 
특히 근현대에 들어와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는데, 대한민국 제3대 [[부통령]]을 지낸 [[함태영|태영]](台永)은 한말(韓末) [[한성재판소]] [[검사]]로서‘[[독립협회 사건]]’ 때 [[이상재]](李商在)ᆞ[[윤치호]](尹致昊)ᆞ[[신흥우]] 등의 무죄를 주장하고 석방했는가 하면, 그 뒤에도 계속 독립운동과 종교운동에 헌신,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정관계에는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낸 [[함병춘|병춘]], 농림부 장관을 역임했고, 강원대학교의 설립자인 [[함인섭|인섭]], 상공부([[산업통상자원부]]) 차관과 초선 국회의원을 지낸 [[함덕용|덕용]], 각각 3선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인 [[함석재|석재]], [[함종빈|종빈]], [[함종한|종한]], 재선 국회의원을 지낸 전(前) [[해군참모총장]] [[함명수|명수]], 역시 재선 국회의원을 지낸 [[함재훈|재훈]]이 있다. 학계에는 상공부 차관을 지내고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교 교수를 역임한 [[함인영|인영]], 한국인 최연소로 28세에 하버드대학교 교수에 임용된 [[함돈희|돈희]], 경북대 총장을 역임한 [[함인석|인석]], 아산정책연구원장 및 이사장에 재임중인 [[함재봉|재봉]]이 있고, 법조계에는 제39대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을 지낸 [[함정호|정호]], 대검중수부 검사, 법무법인 [[대륙아주]]의 설립자, 정치인(16대 국회의원)으로 명망이 높은 [[함승희|승희]]가 있으며, 금융계 및 재계에는 장기신용은행장과 회장을 역임한 [[함태용|태용]], KEB하나은행장에 재임중인 [[함영주|영주]], 오뚜기 회장에 재임중인 [[함영준|영준]]이 있다.
 
 
=== 인물 ===
* '''[[함규]]'''(咸規, [[생년 미상]] ~ [[945년]]) : [[함씨]]의 중시조(中始祖)이자 고려의 개국공신(開國功臣), 권신(權臣). [[고려]] 초기 [[광주시 (경기도)|광주]](廣州)의 대호족으로, [[양근 함씨]]였으나 개국공신으로 [[고려 태조|태조]]에게 왕씨 성을 사성 받아 왕규(王規)가 된다. 함규는 당시 양근을 포함한 광주지역에서 가장 큰 세력을 지닌 인물이었고, 함규는 [[고려 태조|태조]]를 도와 [[후삼국]] 통일에 공을 세워 익찬개국공신(翊贊開國功臣) 등의 작위를 받았다. 중부의 강력한 호족이었던 함규는 고려의 개국공신이 되었고, 지금의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대광(大匡), 광평시랑평장사(廣平侍郞平章事)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왕규는 [[고려 혜종|혜종]]을 보필하라는 태조의 유지를 받들었으나, 혜종 사후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일어난 왕위 쟁탈전인 [[왕규의 난]](王規之亂)으로 [[처형]]당하였다.
*:고려 왕실과의 인척관계 : [[고려 태조|태조]]비 [[광주원부인]], [[소광주원부인]], [[왕무|혜종]]비 [[후광주원부인]]
 
 
* '''[[함유일]]'''(咸有一, 1106년 ~ 1185년) : 고려의 관리. 자는 형천(亨天). 고려 개국공신 함규(規)의 5세손이며,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외삼촌 밑에서 자랐다. 아버지의 친구인 재상(宰相) 이준양(李俊陽)의 도움으로 처음 관직에 올랐으며, 1135년 묘청의 난을 평정할 때 공이 있어 추밀원사(樞密院使) 왕충(王沖)의 추천으로 선군기사(選軍記事)가 되었다. 의종 재위기에 교로도감에 있을 당시 서울에는 무당과 음사(귀신을 모시는 집)가 많아 민심을 현혹시켰다. 그는 이 음사를 모두 불태워 버리고 무당들을 서울 밖으로 내쫓아 미신을 배척한 자로서 유명하였다. 이후, 감찰어사(監察御史), 황주판관(黃州判官), 삭방도감창사(朔方道監倉使)를 거쳐, 명종 때 병부낭중(兵部郎中)·공부상서(工部尙書) 등을 지냈다. 그는 자녀들에게 가난함이 절대로 수치가 아님을 강조하면서, 절약하며 검소하게 살아갈 것을 당부했다. 일생동안 베옷만을 입었으며 질그릇만을 쓰는 등 청빈하게 살았다.
 
 
* '''[[함순 (고려)|함순]]'''(咸淳) : 고려 중기의 문장가. 자는 자진(子眞). 고려 개국공신 규(規)의 6세손이며, 명종 때 공부상서(工部尙書)로 치사(致仕)한 유일(有一)의 아들이다.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문장이 뛰어나고 절행(節行)이 있었다. 또한, 순박하고 중후하여 정도(正道)로 책임을 삼으며 효경과 충신을 바탕으로 한 문사(文辭)가 탁월하였다. 최충(崔冲)이 설립한 문헌공도(文憲公徒) 출신으로 급제 후 양양과 남방 어느 고을의 지방관이 되었고, 감찰어사(監察御史), 형부낭중(刑部郞中), 병부시랑(兵部侍郞) 등을 역임했으며, 최충헌(崔忠獻) 집권시에는 사직(司直)이라는 한직에 머물렀다. 이인로(李仁老)·오세재(吳世才)·임춘(林椿)·조통(趙通)·황보항(黃甫抗)·이담지(李湛之) 등의 명유(名儒)들과 교류를 맺고 진(晋)나라의 죽림칠현(竹林七賢)을 본떠 강좌칠현(江左七賢)을 조직하여, 시(詩)와 술을 즐기며 여생을 보냈다.
 
 
* '''[[함부림]]'''(咸傅霖, 1360년 ~ 1410년) : 조선의 개국공신(開國功臣). 고려 개국공신 규(規)의 13세손인 승경(承慶)의 맏아들로, 태조, 정종, 태종 세 임금을 섬기면서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대사헌(大司憲),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지냈다. 명성군(溟城君), 동원군(東原君)에 봉해졌다.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조선(朝鮮)에서 8도(경기, 충청, 경상, 전라, 강원, 황해, 평안, 함경도)의 관찰사(觀察使)를 모두 지낸 두 인물 중 한 명이다.<ref>http://www.iusm.co.kr/news/articleView.html?idxno=470041#09SC</ref>.<ref>http://www.economytalk.kr/news/articleView.html?idxno=144347#07AG</ref> 시호는 정평(定平). 강릉 함씨 정평공파의 파조(派祖)이다.
 
 
* '''[[함부열]]''' : 고려의 문신. 고려 개국공신 규(規)의 13세손인 승경(承慶)의 둘째 아들로, 고려 우왕 13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공양왕 2년에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냈다​. 그는 이성계의 조선개국을 반대한 두문동(두문불출의 유래) 72현의 학사로서{{출처|날짜=2018-08-31}} 폐위된 공양왕을 끝까지 섬겼다. 함씨 가문 야사(野史)에 의하면, 그는 공양왕 사후, 왕의 시신을 거두어 자신의 묘지 위에 ​가묘(假墓)로 위장했다고 한다. 고려 왕조에 충성을 다한 만고충절의 학사이며, 양근 함씨 죽계공파의 파조(派祖)이다​.
 
 
* '''함화'''(咸華, ? ~ ?) : 조선의 문신. 조선조(朝鮮朝), 현령을 역임. 최치운(崔致雲, 1390년 ~ 1440년)의 부인인 정경부인(貞敬夫人) 함씨(咸氏)의 아버지이다.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가 태어난 오죽헌은 바로 이 최치운이 지은 고택(古宅)이다. 함화의 사위인 최치운에게서 외손인 최응현에게최응현(崔應賢,1428년∼1507년)에게 상속이 되었고, 최응현의 사위인 용인 이씨 이사온(李思溫)에게서 이사온의 사위인 신명화(申命和)에게로 상속이 되었는데, 신명화는 바로 신사임당의 아버지이자, 율곡 이이의 외조부이다. 즉, 함화의 딸인 정경부인 함씨는 신사임당의 외고조모이다.
 
 
* '''[[함우치]]'''(咸禹治, 1408년 ∼ 1479년) : 고려 개국공신 규(規)의 14세손인 부림(傅霖)의 아들. 음보(蔭補)로 벼슬길에 올라 동부승지(同副承旨), 공주목사(公州牧使), 함길도·전라도·경상도의 관찰사(觀察使)를 두루 역임하고, 대사헌(大司憲),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에 올랐으며, 같은 해에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가 되었는데, 재임할 때는 선정을 베풀어 칭송이 자자하였다. 이후, 형조참판(刑曹參判)이 되어 동평군(東平君)에 봉해졌으며, 1470년(성종 1)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올랐다. 1471년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에 책록되고 좌우참찬(左右參贊)을 역임, 뒤에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시호는 평양(平襄).
 
 
* '''[[함헌]]'''(咸軒, 1508년 ∼ ?) : 고려 개국공신 규(規)의 18세손이자 조선 개국공신 부림(傅霖)의 4세손. 아버지는 부호군 좌무(左武). 자는 가중(可中). 호는 칠봉(七峰)이다. 1534년(중종 29) 알성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간성군수가 되었다. 1552년(명종 7) 예빈시정(禮賓寺正)으로 있을 때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 북경(北京)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이천부사(利川副使)가 되었다. 1562년 삼척부사(三陟副使)를 지냈으며, 재임 중 관리들의 기강을 확립하고 백성들을 구휼하여 치적을 남겼다. 저서로는 『칠봉문집(七峰文集)』이 있다. 중종 때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오자도가 그린 공자의 초상을 강릉으로 가져와 오봉서원(五峯書院)을 세웠다. 강릉 함씨 칠봉공파의 파조(派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