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공주 (고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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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낙랑공주'''(樂浪公主) 왕씨는 아버지 [[고려 태조]](太祖)와 제3왕비인 [[신명순성왕후]](神明順成王后) 유씨(劉氏) 소생의 맏딸로, [[경순왕]]과 혼인 전에는 '''안정숙의공주'''(安貞淑義公主)라 불렸으며, 혼인 후에는 '''낙랑공주'''(樂浪公主)
또는 '''신란궁부인'''(神鸞宮夫人)이라 불렀다.<ref>외조부는 태사 내사령(太師 內史令)에 추증(追贈)된 [[유긍달]](劉兢達)이다.</ref>
 
[[935년]] 11월 22일 [[고려 태조]] [[왕건]](王建)은 신라 [[경순왕|경순왕 김부]](金傅)가 입조(入朝)하자 정전(正殿)에 나아와 백관을 모아놓고 예를 갖추어 첫째딸인 그녀와 혼인을 시켰다. 그녀는 [[고려 정종 (3대)|정종]](定宗)과 [[고려 광종|광종]](光宗)의 누이동생 이기도 하다. 이후 [[고려 태조]]는 후궁 [[성무부인]](聖茂夫人) 소생의 아홉째 딸도 [[경순왕]]과 혼인 시켰다.<ref>그녀의 외조부는 호족 박지윤(朴智胤)이다.</ref>
 
[[고려 태조|태조]](太祖) [[왕건]](王建)도 신라 [[경순왕|경순왕 김부]]의 백부 김억렴(金億廉)의 딸인딸을 제5왕비로 맞아들였는데, 그녀가 [[신성왕후|신성왕태후 김씨]](神成王 金氏)이다.<ref>[[고려 제5왕비로안종|안종]](安宗)으로 맞아들였다추존된 왕욱(王郁)의 생모이다. </ref>
 
이와 같이 지방 호족이었던 [[고려]] 왕실은 2명의 공주를 신라 [[경순왕|경순왕 김부]]와 혼인시키고, [[고려 태조]] 왕건 자신도 신라 [[경순왕|경순왕 김부]]의 사촌 여동생과 혼인을 하였는데, 이는 [[고려]]에 귀부한 신라왕 [[경순왕|김부]]에 대한 예우적인 측면도 있지만, 이중 혼인을 통해 [[고려]] 왕실의 신분을 [[신라]] 왕실과 대등하게 상승시켜 통일된 나라를 용이하게 지배할 수 있는 권위를 보장받으려는 의도에서 행해진 것이라 보여 진다.
 
신라 [[경순왕|경순왕 김부]]는 고려에 항복 후 슬하의 첫째딸을 고려 제5대 왕 [[고려 경종]]에게 출가시켰는데, 그녀가 [[헌숙왕후|헌숙왕후 김씨]](獻肅王后 金氏)이다. [[헌숙왕후|헌숙왕후 김씨]] 어머니에 대해 조선조[[조선]]조 말 [[1814년]](조선 순조 14년14) [[경주 김씨]] 일문들이 세운 《신라경순왕전비》에 [[경순왕]]의 [[죽방부인|전비 박씨]] 소생이라 하나, [[고려 경종]]은 [[고려 태조]]의 손자로 [[955년]] 태어나 [[975년]]에 왕위 올랐는바, 배우자인 그녀도 [[955년]]경 태어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할 것이다. 따라서 그녀의 어머니는 시대상으로 [[죽방부인]] 보다는, 후비인 [[낙랑공주 왕씨]] 소생이라 함이 타당하다 하겠다. 이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자세히 상고할 수 없다.<ref>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5COa_A9999_1_0014552 {{웨이백|url=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5COa_A9999_1_0014552 |date=20160310123957 }}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헌숙왕후〉항목]</ref><ref>http://gsm.nricp.go.kr/_third/user/search/KBD008.jsp?ksmno=8541]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신라경순왕전비(新羅敬順王殿碑)]</ref>
 
== 가족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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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헌 왜곡 ===
*《김은열 묘지명》에 나오는 [[경순왕]] 8자들은 《고려사》 등의 문헌(文獻)은문헌은 물론이고, 그 어떤 금석문(金石文) 자료에도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또 생애 및 배위(配位) 등도 누락되어 있고, 단지 형제 서차만 기술되어 있을 뿐 묘지명 형태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 후손이라는 [[김사목]](金思穆)은 《김은열 묘지명》을 족보에 옮기면서 2자 '굉'(鍠)을 '황'(湟)으로, 3자 '명'(鳴)을 '명종'(鳴鍾)으로 개명하고, 4자 은열(殷說)의 시호를 보국대안군(輔國大安君)이라 작호(作號) 하였다.
* 《신라경순왕전비문》에서는 1자 일(鎰), 2자 황(湟), 3자 명종(鳴鍾)을 누락하고, 제5자 '중석'(重錫)을 '석'(錫)으로, 제8자 '종'(鐘)을 '추'(錘)로 개명하였다. 또 2녀를 추가하였다.
* 《김씨 분관록》에서는 《김은열 묘지명》에 기록되어 있는 8자들은 모두 배척하고, 《신라경순왕전비》에 [[경순왕]] [[낙랑공주 (고려)|후비 왕씨]] 소생 중 '석(錫), 선(鐥), 추(錘)' 3명에 대해서만 군호를 붙여 의성군 석(錫), 언양군 선(鐥), 삼척군 추(錘)라 하며 시조로 기록하였다.
* 이후 [[경주 김씨]] 일문에서는 《신라경순왕전비문》을 재차 왜곡하여 전비 [[죽방부인죽방 부인|전비 박씨]] 소생의 [[마의태자|태자]]의 이름이이름을 '일'(鎰)이라 하고, 둘째 왕자는왕자를 '황'(湟)이라 하며, 셋째 왕자는왕자가 명종(鳴鍾)이며 영분공(永芬公) 시호를 받았다고 하는 등 가필(加筆)을 심하게 하였다. 그러나 정작 《김은열 묘지명》 원본에는 2자 황(湟)과 4자 은열(殷說)은 [[고려 태조]]의 외손인 [[낙랑공주 (고려)|낙랑공주 왕씨]] 소생으로 [[고려]]조에 평장사를 지내고, 나라에 공(功)이 있는 신하여서 특별히 장지(葬地)까지 하사해 주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김은열 묘지명》등은 정사(正史)에 뒷받침 되지 않은 내용으로 조선 후기 족보 편찬 과정에 위조(僞造)된 지석(誌石)을 바탕으로 가탁(假託) 내지 조작(造作)되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 자녀 (추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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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자 : 김건(金鍵) - [[강릉 김씨]] 시조로 소원시킴<ref>작금에 와서 [[강릉 김씨]] 시조라 한다. 그러나 《증보문헌비고》 및 《조선씨족통보》에는 이름이 누락되어 있다.</ref>
* 7자 : 김선(金鐥) - [[언양 김씨]] 시조로 소원시킴<ref>일설에 제6자(第六子)라 한다.</ref>
* 8자 : 김종(金鐘, 김추(金錘)로 개명) - [[삼척 김씨]]· [[선산 김씨|선산 김씨 김추 계]] 시조로 소원시킴<ref>작금에 와서 [[삼척 김씨]]와 [[선산 김씨]]에서는 서로 자신들의 시조라 한다. 그러나 《증보문헌비고》 및 《조선씨족통보》에는 이름이 누락되어 있다.</ref>
* 2녀 : [[경주 이씨]] 이금서(李金書)에게 출가
* 3녀 : [[장수 황씨]] 황경(黃瓊)에게 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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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순왕]]
* [[헌숙왕후]]
* [[나주 김씨]]
* [[경주 김씨]]
* [[의성 김씨]]
* [[언양 김씨]]
* [[삼척 김씨]] (또는 [[선산 김씨]])
* [[선산 김씨|선산 김씨 김추 계]]
 
== 각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