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가톨릭교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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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방교회의 개혁 운동 ===
[[파일:Religion_Overthrowing_Heresy_and_Hatred_Legros.jpg|섬네일|upright|[[제수 성당]]에 전시된 피에르 르 그로의 '''증오와 이단을 타도하는 교회'''. 십자가와 벼락을 쥐고 있는 젊은 여인은 교회를, 늙은 여자는 증오를, 아래의 늙은 남자는 이단을 상징한다. 그리고 여인 옆에 있는 아기 천사가 찢는 책은 츠빙글리의 것이고, 늙은 남자 아래에 깔려 있는 책에는 마르틴 루터의 이름이 적혀 있다고 한다.]]
1517년 독일에서 [[마르틴 루터]]가 몇몇 주교들에게 [[95개조 반박문]]을 작성, 동봉하여 보냈다.<ref name="Bokenkotter215">Bokenkotter, p. 215</ref> 반박문에서 루터는 [[대사 (가톨릭)|대사]](또는 [[면죄부]])의 특전 등 당시 서방교회의 교리들을 공격하였다.<ref name="Bokenkotter215"/><ref name="Vidmar184">Vidmar, p. 184.</ref> 스위스에서는 [[울리히 츠빙글리]]와 [[장 칼뱅]] 등이 등장하여 서방교회와 교황청을 비판하였다. 이러한 독자적인 신학 노선이 유럽 안에 퍼져갔는데, 이러한 운동을 소위 [[종교 개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ref name="Bokenkotter223">Bokenkotter, pp. 223–224</ref> [[잉글랜드 종교 개혁]]은 [[헨리 8세]] 치세에 정치적 분쟁으로 촉발되었다. 헨리 8세는 교황에게 당시 왕비였던 [[아라곤의 캐서린]] 사이에 맺어진 혼인을 무효화해달라는 요구를 했으나 거절당하자, [[수장령]]을 선포하여 자신이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임을 선언하였다.<ref name="Bokenkotter235">Bokenkotter, pp. 235–237</ref>
 
독일에서 발생한 종교 개혁은 [[개신교]] [[슈말칼덴 동맹]]과 로마가톨릭 측의 대표인 [[카를 5세]] 황제 사이에 전쟁을 불러왔다. 양측의 첫 번째 충돌은 9년 전쟁으로서 1555년에 종전했지만, 긴장 상태는 계속 이어져 결국 1618년에는 더 큰 충돌인 [[30년 전쟁]]이 발발하였다. 30년 전쟁은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가톨릭교회와 개신교 모두 동등한 권리를 갖는 데 합의함으로써 종식되었으며,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다.<ref>{{웹 인용|url=http://www.catholictimes.org/view.aspx?AID=140208&ACID=44&S=|제목=세계교회사 100대 사건 -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71) 반종교 개혁|날짜= 2003-01-12 |출판사=가톨릭신문|확인날짜=2012-4-29|저자=박영호 기자}}</ref> 프랑스에서는 1562년부터 1598년까지 [[위그노]] 교도와 [[가톨릭 동맹 (프랑스)|프랑스 가톨릭 동맹]] 간에 [[위그노 전쟁]]이라고 불리는 전쟁이 일어났다. 이 시기에 재임한 교황들은 가톨릭 동맹 편에 서서 그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하였다. 프랑스 내 가톨릭 동맹과 위그노 세력의 분쟁은 1598년 [[앙리 4세]]가 종교적 관용 정신에 따라 개신교도들을 국가의 시민으로 인정하고 그들의 예배 자유를 인정하는 내용을 담은 [[낭트 칙령]]이 반포되고 [[교황 클레멘스 8세]]가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끝을 맺게 되었다.<ref name="Vidmar233">Vidmar, ''The Catholic Church Through the Ages'' (2005), p. 233</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