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양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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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양왕'''은 강원도 간성에 머무르다가 [[1394년]](태조 3년) [[3월 14일]]에 [[삼척시|강원도 삼척]] 궁촌리로 유배지가 옮겨졌다.<ref name="간성왕"/> [[4월 17일]] 궁촌리 마을입구 고갯길에 있는 고돌산의 살해재에서 왕세자 [[왕석]]과 함께 시해되었다<ref>함씨 집안 야사에는 간성왕의 최후가 좀더 상세하게 전해오고 있다. [[1394년]] 3월에 함부열은 삼척으로 두 번째 유배되는 간성왕의 뒤를 따랐다. 내려간 지 한 달 만에 간성왕을 시해하기 위하여 중앙에서 관리가 내려왔다. 역사 기록에는 중추부사 정남진이 내려왔다는데, 함씨 집안에 전해오는 얘기로는 함부열의 형 형조의랑 함부림도 동행했다고 한다. 함부열은 마주친 형에게 간청하여 다른 왕족의 시신만 거두게 하고 간성왕을 간성으로 피신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정남진과 함부림은 도저히 조정의 뜻을 거역할 수 없어서 간성으로 자객을 보내 간성왕을 시해해버렸다. 그게 [[공양왕]] 삼척 사망일인 4월17일에서 8일이 더 지난, 4월25일의 일이라는 것이다.
 
살해된 간성왕은 금수리 수타사에서 가까운 고성산 기슭에 묻혔다고 한다. 매장을 주도한 사람은 함부열이다. 함부열은 유언으로 간성왕 밑에 자신을 묻고, 자신의 묘에 제사 지내기 전에 왕 무덤에 축문 없는 제사를 지내라고 했다.</ref>. [[1416년]] [[이방원조선 태종|태종]]은 '''공양왕'''(恭讓王)으로 추봉을 하고, 사신을 보내 그의 능에 제사를 지내었다<ref>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 권제32, [[이방원|태종]] 16년(1416년) 8월 5일(갑자)</ref>.
 
== 두 개의 능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