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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장'''(梨花莊)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거주하던 곳으로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뒤쪽 [[낙산]] 기슭에 있다. 동쪽으로 [[창신동]], 남쪽으로 [[충신동]], 서쪽으로 [[연건동]], 북쪽으로는 [[동숭동]]에 둘러싸인 마름모꼴의 지형을 이룬 언덕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 가옥은 본채, 별채인 조각당, 그리고 여러 부속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본채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내외가 살던 곳이고, 조각당은 1948년 7월 20일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이 이곳에 조각 본부를 두고 국무총리와 12부 장관의 초대 [[내각]]을 구상한 곳이다.
 
1982년 12월 28일 [[서울특별시의 기념물]] 제6호로 지정되었다가, 2009년 4월 28일 [[대한민국의 사적|사적]] 제497호로 승격되었다.<ref>[http://gwanbo.mois.go.kr/gwanbo/dailyGazetteList.gz?searchDate=20090428&tSearchDate=20090428#none 문화재청고시제2009-35호]{{깨진 링크|url=http://gwanbo.mois.go.kr/gwanbo/dailyGazetteList.gz?searchDate=20090428&tSearchDate=20090428 }},《이화장 사적 지정 및 지형도면》, 문화재청장, 대한민국 관보 제16990호, 48-49면, 2009-04-28</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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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일찍이 [[조선 중종|중종]] 때의 문신(文臣)인 기재(企齋) 신광한(申光漢, 1484∼1555)의 옛 집터로 일명 신대(申臺)라 부르기도 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던 곳이었다. 중종 때 문장·글씨·그림을 잘하여 당대의 삼절(三絶)이라는 칭송을 받은 신잠(申潛, 1491∼1554)이 <이화정에서 술에 취하여>라는 시를 읊으며 젊은 날을 회고하였는데, 거기에 "뜰 앞엔 배꽃만이 피었을 뿐, 노래하고 춤추던 그때 사람들 볼 수 없구나"라는 구절이 나온다.
 
인근에는 효종의 잠저(潛邸)인 용흥궁(龍興宮)이 있었으며, 또 [[조선 인조|인조]]의 세째 아들 [[인평대군]](麟坪大君, 1622∼1658)의 석양루(夕陽樓)가 있었다. 《[[동국여지비고]]》 제택조(第宅調)에 "인평대군의 집은 건덕방 [[낙산]](駱山) 아래에 용흥궁과 동서로 마주 대하고 서 있는데, 석양루가 있다. 기와·벽 등에 그림이 새겨져 있고 또 규모가 크고 화려해서 서울 장안에서도 으뜸가는 집이었다. 지금은 장생전(長生殿, 궁중 장례식에 쓰일 관을 제작하던 관아 )이 되었다."고 쓰여 있다. 이 장생전은 이승만이 이곳에서 조각(組閣)할 당시에도 건물의 일부가 이화장 정문 앞에 남아 있었다.
 
이화장 뒷문 개울가 바위에 신대를 기념하기 위해 정조 때 서화가이며 한성판윤을 지낸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2∼1791)이 쓴 '紅泉翠壁(홍천취벽)'이라는 큼직한 각자가 1960년대 초까지도 남아 있었으나 4·19혁명 이후 계곡을 메우고 집이 들어서면서 땅에 묻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