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수스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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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수스 전투'''는 [[로마 공화정]] 말기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민중파와 공화정 [[원로원]]파 사이에 벌어진 [[카이사르의 내전|내전]]의 중의 하나이다. [[기원전 46년]] [[4월]]북아프리카 탑수스(현재의 [[튀니지]])에서 벌어진 대규모 회전으로 카이사르파가 승리하였다.
== 전투전의 상황 ==
[[기원전 48년]]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카이사르에게 참패한 [[폼페이우스]]는 이집트에서 살해 당하였지만 나머지 장군들과 원로원파 의원들은 아프키라에[[아프리카]]에 모여 카이사르에 대항하려고 힘을 모으고 있었다. 이들은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메텔루스 스키피오]]와 [[카토 (소)|카토]]를 중심으로 폼페이우스의 두 아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그나이우스]]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섹스투스]], [[티투스 라비에누스]], 아프라니우스등 이었다. [[누미디아]]의 왕 유바도 중요한 동맹군으로 모였다. 원로원파는 신속하게 대군을 편성하여 대략 10개 [[로마 군단|군단]]과 동맹 누미디아 4개군단4개 군단, 유명한 누미디아 기병 6,000명을 포함한 15,000명의 기병을 보유하게 되었다.
 
카이사르는 동방과 그리스에서 원정을 마치고 잠시 로마에 들렀다가 [[기원전 47년]] 12월말 아프리카에 상륙했다. 처음에 볓번의 소규모 전투를 치르기만하고 메텔루스 스키피오는 진영인 우티카에서 좀처럼 나오지 않으려 했으나 [[시칠리아]]에서 속속 카이사르의 증원병이 도착하자 드디어 결전에 나서기로 하였다.
 
== 전투 ==
[[기원전 46년]] [[4월 6일]] (다른 사료에는 2월 6일) 양군은 탑수스에서 맞붙었다. 카이사르는 종래의 진형과는 전혀 다르게 기병을 가운데에 배치하고 보병과 갈리아 병사를 나누어 배치했다. 특히 극좌익과 극우익에는 전투 코끼리전담부대를 배치했다. 이에 맞서는 메텔루스 스키피오는 정석대로 보병을 가운데에 배치하고 좌우익에 기병과 코끼리를 배치했다. 카이사르는 누미디아의 증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빨리 승부를 결판지어야 했기 때문에 기병을 가운데에 배치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