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리즈카 투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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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리즈카에서는 목장과 관계된 [[상점]]들이 성업하여 [[청과점]]・[[어물전]]・[[양재점]] 등의 위세가 날아가는 새를 떨어뜨릴 정도였다.<ref name=":4"/> 때때로 목장을 방문하는 [[일본 황족|황족]]들도 주민들에게 친근하고 친밀한 존재였다. 히로히토 황태자(후의 [[쇼와 천황]])의 결혼을 기념해 심은 대나무 숲에, 초봄이면 먼 곳에서까지 [[꽃놀이]]를 오는 일본 유수의 [[벚꽃]]길까지, 산리즈카는 치바현 제일의 경승지로 알려졌다.<ref name=":34" />
 
[[타카무라 코타로]]도 『춘구』(春駒)에서 「산리즈카의 봄은 크구나」로 시작하는 시에서 옛 어료목장의 모습을 읊었다.<ref name="sanridukanoharu">{{웹 인용|url=http://mitoho.com/109/05-minami-kanto/chi-01-3riduka.html|title=航空科学博物館-成田空港滑走路先端 |accessdate=2017-10-09|date=2012-02|publisher=今日は近くの図書館|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0708123911/http://mitoho.com/109/05-minami-kanto/chi-01-3riduka.html|보존날짜=2016-07-08|깨진링크=예}}</ref> “어료목장을 모르는 놈은 공항에 반대하는 근거가 없다,” “(공항건설로) 어료목장이 없어진다고 해서 여기 근처 사람들 모두 정신이 이상해진 것이다”라고 지역민이 이후 말했을 정도로 어료목장은 인근에서 생활을 영위하는 주민들에게 물심양면으로 빼놓을 수 없는 존재였다.<ref name=":4" />
 
=== 고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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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패전 직후인 1946년, [[전후개척]]의 일환으로 어료목장 부지 중 약 1,000 [[정 (단위)|정보]]가 농지로 개방되었고,<ref name=":34" /> 현유림의 일부였던 [[토지]]가 매각되면서 이주가 시작되었다. [[텐나루]]・[[키노네]]・[[히가시산리즈카]]・[[후루고메]]・[[토호 (나리타시)|토호]] 등 나리타측의 경작지 대부분이 이 때부터 [[개간]]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정착민들은 신궁민(新窮民)이라고도 불렸는데, 패전으로 인해 식민지에서 쫓겨난 [[히키아게샤]], [[오키나와 전투]]로 황폐해진 고향이 미국의 통치에 놓여 귀가할 수 없게 된 [[오키나와현]] 출신자, 장남이 아니라 [[가독]]을 잇지 못한 농가의 차남 이하 아들들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ref name=":16" /><ref name=":4" /> 불하 가격은 단당 80엔([[피스 (담배)|쇼트피스]] 2통 상당) 정도였다.<ref>[[#石毛博道|朝日新聞成田支局(1998)]]20頁。</ref>
 
신궁민들은 대부분 몸뚱이만 갖고 개간을 시작했기 때문에 생활상이 매우 가난했다. 신궁민들은 개간이 어려워{{refnest|group=注|개척지 대부분이 경작에 알맞은 토지가 아니었지만, 특히 어려웠던 곳이 [[죽림]]의 [[땅속줄기]]가 깔려 있던 [[토호 (나리타시)|토호]] 지역이었다.<ref name="ishige">[[#石毛博道|朝日新聞成田支局(1998)]]17-20頁。</ref><ref>[[#福田克彦|福田克彦(2001)]]59-60頁。</ref>}} 낮에는 고촌에서 [[소작농|소작]]하여 수익을 얻고 밤에 달빛 아래에서 [[괭이]] 1개로 개간을 했다. 밥 지을 시간도 아까워서 4일치 쌀을 [[솔잎]] 따위로 쪄서 공기가 닿아 쉬는 부분을 최소화해서 먹었다. 그리고 [[전기]]도 [[수도]]도 통하지 않는 삼각형의 허술한 짚오두막에서 원시적인 생활을 영위했다.{{refnest|group=注|가즈사와의 분수령에 위치한 고지대인 텐나루와 키노네에서는 물을 확보하는 데도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여 목욕물을 교환하기도 여의치 않았다.<ref>[[#福田克彦|福田克彦(2001)]]61頁。</ref>}}<ref name=":16" /><ref name=":35">[[三里塚闘争#宇沢弘文|宇沢弘文(1992)]]91-97頁。</ref><ref name="ishige" /><ref name="fukuda355867">[[#福田克彦|福田克彦(2001)]]35・58-67頁。</ref><ref>{{웹 인용|url=http://rekishidensho.jp/kikakutenji.html|title=企画展示|accessdate=2017-08-29|publisher=NAA歴史伝承委員会|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0329182448/http://www.rekishidensho.jp/kikakutenji.html|보존날짜=2016-03-29|깨진링크=예}}</ref><ref name="drum284">[[#石毛博道|朝日新聞成田支局(1998)]]284頁。</ref><ref name=":9">[[#隅谷三喜男|隅谷三喜男(1996)]]3-5頁。</ref>
 
농가로서의 생존을 건 토지분쟁도 발생했다. 열악한 환경에 견디지 못한 정착민들은 속속 탈락해갔다. 결과적으로 이 땅에 남은 것은 탈락자들로부터 농지를 매입해 생계를 이을 수 있을 만큼의 농지면적을 확보한 사람들이었다.{{refnest|group=注|「와세다대학 나리타투쟁지원 모임」의 기관지 『브 나로드』에는 “나무를 베고 대나무를 잘라 기둥을 세운 위에 지붕을 만든 것 같은 집에 살았습니다. 물론 비가 오면 새고, 바람이 불면 외풍이 듭니다. 겨울의 추운 밤은 밤새 불을 때며 보낸 적도 있고, 또 (토지분쟁에서) 방화를 당해 쌀과 집을 홀랑 태워먹은 적도 있고, 1년 내내 그렇게 더딘 생활을 하며 겨우 여기까지 왔습니다 …… 당시의 모습을 이야기해도 아마 당신은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매일 그저 일하기만 했습니다. 내년까지 어떻게 씨앗을 남길지 벅찼습니다. 처음으로 내가 심은 작물이 열렸을 때는 정말로 눈물이 났던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온 우리가 결국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자신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라는 텐나루 정착민의 말이 실려 있다. 투쟁 초기에 지원을 들어간 외부인들은 이런 개척민들의 고충을 듣고 그렇게 고생했으니 땅을 포기할 수 있겠냐며 투쟁의 영원성을 기대했지만 [[후쿠다 카츠히코]]는 가혹한 환경에서의 영농으로 길러진 인간불신의 정신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자신 이외에 없다”는 말로 나타난 것으로 분석하고 지원세력은 이를 간파하지 못한 것으로 보았다.<ref>[[#福田克彦|福田克彦(2001)]]65頁。</ref>}}<ref name=":22" /><ref name="fukuda3558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