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 해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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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인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 새벽 4시경, 요시히로 등이 이끄는 일본 함선 500여 척이 노량에 진입하자 매복해 있던 조선 함선들이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순신 함대가 적선 50여 척을 격파하고 200여 명을 죽이니 적은 이순신을 포위하려 했고, 이후 순천왜성 포구를 나선 유키나가의 일본 수군과 진린의 명 수군이 합세하여 4시간여 동안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같은 날 오전 8시경, 전투는 막바지에 이르고 이미 200여 척 이상이 분파되고 150여 척이 파손돼서 패색이 짙어진 일본 수군은 잔선 150여 척을 이끌고 퇴각하기 시작했으며, 조명 연합함대는 오후 12시경까지 잔적을 소탕하며 추격을 계속하였다. 도주하는 일본 함대를 추격하던 이순신은 관음포에서 일본군의 총탄을 맞고 쓰러지면서, “'''싸움이 급하니급하다. 단 한명의 조선수군도 동요되서는 아니되기,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으며, 가리포첨사 [[이영남]]·낙안군수 [[방덕룡]]·초계군수 이언량 흥양현감 고득장 등 명나라 수군 부총병 [[등자룡]] 역시 추격 도중 전사하였다. 이 때 도주하던 150여 척의 일본 함선 중 100여 척을 나포하니 겨우 50여 척의 패전선만이 도주했다고 한다.
 
결국 왜교에서 봉쇄당하고 있던 고니시 군은 노량해전의 혼란을 틈타 남해도 남쪽을 지나 퇴각하여 시마즈 군과 함께 일단 [[부산]]에 집결, 그 즉시 퇴각하였으며 노량 해전을 끝으로 정유재란이 막을 내리고, 7년간의 긴 전쟁도 끝이 났다.
 
== 평가 ==
[[쓰시마 국]]주 소 요시토시가 6만 군대를 지휘할 권리는 없었다고 한다. 당시 22만석의 영지를 가지고 있던 [[사쓰마 국]]주 시마즈 요시히로가 지휘한 병력이 7천에서 1만 규모인데 반해 그보다 6배 이상 많은 병력을 지휘하는 장수는 당시 출병한 장수들 중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의 450여척의 전선을 격파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조명 연합군은 이순신과 진린이 이끌었고, 일본군은 순천왜성에서 탈출하려는 유키나가와 진린의 어처구니 없는 뇌물매수로 인해 발생하게 된 사천의 일본 구원병과 함께 서로 전투에 임하였다. 이 전투에서 조명 연합군은 유키나가가 이끄는 순천의 일본군이 일본으로 탈출하는 것을 막으려 했으나, 전투 초기 진린은 여전히 멀찍이서 관망만 하다 조선 수군의 분투를 보고 마침내 참전하였으나 오히려 일본군에 포위되어 이순신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을 정도로 조명 연합군의 공조가 여전히 좋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