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항공 우주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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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CA 시대 ===
[[1957년]] 말부터 [[1958년]] 초에 걸쳐 NACA (미국 국가항공자문위원회)는 그때까지 자신들이 한 일과 같은 역할을 맡은 비군사적 기관의 신설에 대한 검토를 시작했다. 또 그 개념을 정밀 조사하기 위해서 몇 개의 위원회를 창설했다. [[1958년]] [[1월 12일]], NACA는 가이포드 스테버(Guyford Stever)를 의장으로 하는 '우주 기술 특별 위원회' 를 설립했다. 이 위원회는
[[1958년]] [[1월 14일]], NACA 책임자 휴 드라이덴은 '우주 기술을 위한 국가적 조사 계획'을 발표해, 이하와 같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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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2|미국의 위신 및 군사적 필요성의 양면에서 생각하면, 이번 도전(스푸트니크)에 휩쓸린 우주 정복을 위한 조사 및 개발의 계획을 정력적으로 추진하는 것은 긴급하고 중요한 과제이다.(중략) 그 때문에, 비군사적인 국가 기관에 의해서 과학적인 조사를 해야 한다는 제안이 이루어졌다.(중략) NACA는 우주 개발 기술의 주도권을 취해 그 성과를 급속히 확대해 연장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1958년]] [[1월 31일]] 오후 10시 48분 (미국 동부표준시), [[미국]] 첫 인공위성인 [[익스플로러 1호]]가 발사되었다. [[1958년]] [[3월 5일]], 대통령 직속 과학 기술 자문 위원회의 위원장 제임스 킬리안(James Killian)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민간 우주 계획을 위한 조직」이라는 제목의 서신을 보내, 일정의 지연을 최소한으로 억제해 조사 계획을 확장할 수 있도록 NACA를 강화해 재편한 조직에 의한 [[문민 통제]]형의 우주 계획을 창립하는 것을 재촉했다. 동년 [[3월]] 말에 NACA는
동년 [[4월]],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의회 연설을 통해, 민간 주도의 우주 개발 기관을 신설할 의향과 미국 항공우주국 설립을 위한 예산안을 설명했다. NACA의 조사 활동 하나를 봐도, 그 규모나 진전, 관리, 운영 등에 있어서 변화가 이루어져야 했다. [[7월 16일]], 의회는 예산안을 승인하고, 동시에 NASA 설립을 위한 구체적인 근거가 된 '국가 항공 우주 결의'에 대해서도 약간의 언급을 했다. 그 이틀 후, [[베르너 폰 브라운]]이 인솔하는 작업 그룹은 예비 보고서를 제출해, 현재 미국의 우주 개발은 여러 가지 기관이 따로 시행하고 있어 상호 제휴가 결핍되어 국가적 노력이 중복되어 손해가 크다는 것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스테버의 우주 개발 위원회는 브라운의 비판에 동의해, [[10월]]에는 최종적인 초안이 제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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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7월 29일]],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국가 항공 우주 결의에 서명해, 미국 항공우주국(National Aeronautics and Space Administration, NASA)이 정식으로 발족했다. 동년 [[10월 1일]]에 공식 업무가 시작되면서, NASA는 즉시 46년의 역사를 가지는 NACA의 조직(8천여 명의 직원, 1억 달러의 연간 예산, 세 개의 주요한 연구 시설(랭글리 연구소, 에임스 항공 연구소, 루이스 비행 추진 연구소)과 두 개의 작은 실험 시설 등)을 흡수했다.
[[베르너 폰 브라운]] 박사가 소속되어 있던 육군 탄도 미사일국과 해군 조사 연구소도 NASA에 병합되었다. NASA가 [[소비에트 연방|소련]]과의 [[우주 개발]] 경쟁에 참가할 즈음에 중요한 공헌을 이룬 것은
[[파일:Mercury 3.jpg|left|섬네일|120px|[[1961년]] [[5월 5일]], [[미국]] 최초의 유인 우주선인 [[머큐리-레드스톤 3호|프리덤 7호]]가 발사되고 있다.]]
{{본문|머큐리 계획}}계획
창설 후 NASA가 최초로 시행한 계획은
[[1961년]] [[5월 5일]], 제1차 선발 비행사 그룹 '머큐리 세븐'의 한 사람인 [[앨런 셰퍼드]] 비행사가 머큐리 우주선 [[머큐리-레드스톤 3호|프리덤 7호]]로 15분 간의 탄도 비행에 성공해 [[미국]] 첫 우주 비행사가 되었다. 그 후 [[1962년]] [[2월 20일]]에는 [[존 글렌]](John Glenn) 비행사가 [[프렌드십 7호]]로 2시간 반의 비행을 실시해 첫 [[지구]] 주회 비행을 성공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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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폴로 계획 ===
{{본문|아폴로 계획}}
[[아폴로 계획]]은
=== 스카이랩 계획 ===
{{본문|스카이랩}}
[[스카이랩]]은 [[미국]]이 [[지구]] 주회 궤도 상에 발사한 [[미국]] 최초의 [[우주 정거장]]이자 연구실이었다. 무게가 100톤 가까이 나가는 [[스카이랩]]은 [[1973년]]부터 [[1979년]]까지 [[지구]]를 계속 주회하고, [[1973년]]과 [[1974년]] 3회에 걸쳐서 비행사가 탑승했다. [[스카이랩]]은
=== 아폴로-소유즈 시험 계획 ===
{{본문|아폴로-소유스 시험 계획}}
[[파일:Apollo-soyuz.jpg|right|섬네일|150px|국립 항공 우주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아폴로와 소유스 우주선]]
[[아폴로-소유스 시험 계획]]은
[[파일:Space Shuttle Columbia launching.jpg|left|섬네일|200px|[[1981년]] [[4월 12일]], [[STS-1]]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발사되고 있는 [[컬럼비아 우주왕복선|컬럼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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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부터 [[1980년대]]에 걸친 기간 동안 NASA의 최대 프로그램은 [[우주왕복선]]이었다. [[우주왕복선]]은 [[1985년]]까지 재사용이 가능한 4기가 제작되었고, 그 1번기인 [[컬럼비아 우주왕복선|컬럼비아]]는 [[1981년]] [[4월 12일]]에 처음으로 발사되었다.
[[우주왕복선]] 프로그램은 NASA에 있어서 반드시 좋은 계획은 아니었다. 발사에 소요되는 비용은 당초에 예상되었던 것보다 매우 많이 들었고, 발사가 일상화되는 것에 따라 미국 국민은 [[우주 개발]]에 대한 관심을 잃어 갔다. 그러던 도중, [[1986년]]에 일어난 [[챌린저 우주왕복선 참사]]는
그러던 도중, 이후에 [[국제 우주 정거장]](International Space Station, ISS)으로 발전하는 [[프리덤 우주 정거장]] 계획이 유인 우주 비행의 초점으로서 제안되었지만, 이러한 계획은 [[보이저 계획]]과 같은 무인 행성 탐사에 비해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는 지적이 NASA 내부에서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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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우주왕복선]]은 [[허블 우주 망원경]](Hubble Space Telescope, HST)과 같은 획기적인 계획도 성공시켰다. HST는 NASA와 [[유럽 우주국]](European Space Agency, ESA)의 공동 개발에 의해서 개발된 것으로, 이 계획의 성공에 의해서 타국 우주 기관과의 협력이라는 새로운 [[우주 개발]] 방법이 열렸다. HST에 소요된 예산은 20억 달러 이하로, [[1990년]]에 가동을 시작한 이래, 수많은 선명한 천체 사진을 계속 보내 여러 과학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허블 딥 필드]](Hubble Deep Field)는 특히 유명하다.
[[1995년]], [[셔틀-미르 계획]]에 의해서 [[러시아]]와의 공동 계획도 재개되었다. [[미르]]와 [[우주왕복선]]이 도킹하면, 이것은 완전한 [[우주 정거장]]이 될 수 있었다. 이 [[미국]]과 [[러시아]]라고 하는 [[우주 개발]]에 있어서의 2대 주자의 협력 관계는
[[국제 우주 정거장|ISS]]는 주된 자재의 운반은 모두 왕복선에 의지하고 있다. [[1986년]]의 [[챌린저 우주왕복선 폭발사고|챌린저 사고]]와 [[2003년]]의 [[컬럼비아 우주왕복선 공중분해사고|컬럼비아 사고]]로, 우주왕복선 계획은 2기의 기체와 14명의 비행사를 잃었다. 사고로 붕괴된 [[챌린저 우주왕복선|챌린저]]를 대체하기 위해 새롭게 [[인데버 우주왕복선|인데버]]가 제작되었지만, [[컬럼비아 우주왕복선|컬럼비아]]의 붕괴를 대체하기 위한 새로운 기체 제작은 실행되지 않았고, 신형 우주선 [[오리온 우주선|오리온]]으로의 이행이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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