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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소년기 ====
서당에서 훈장으로도 활동했으며, 동시에 접주(接主)<ref>학설에 따라 뜻이 다르다. 동학이 생겨나기 전에는 ‘훈장 밑에서 접(接, 십여 명의 생도)을 가르치는 교사’ 또는 ‘과거에 응하는 선비의 무리를 인솔하던 사람’을 뜻했으나, 동학에서는 ‘접(接)의 우두머리’를 뜻한다.</ref> 일도 하고, 지관으로 묘자리도 점지해 주었다고 한다주었다.<ref>[[1960년]]대까지 그의 제자였던 이가 100여 세의 고령의 나이로 [[전라북도]] 태인에 생존해 있었다 한다.</ref> 또한 시장에서 상인으로 활동하며 장사에 종사하기도 했다.
 
또한 시장에서 상인으로 활동하며 장사에 종사하기도 했다.
[[1893년]] 그의 아버지 [[전창혁]](全彰赫, 일명 [[전승록]])은 [[탐관오리]]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욕에 저항을 하다가 [[조병갑]]의 모친상 때 부조금 2천 냥을 안 거둬 줬다는 이유로 모진 곤장을 맞게 되어<ref>[http://monthly.chosun.com/board/view_turn.asp?tnu=200612100025&catecode=C&cpage=1 <nowiki>[확인취재]</nowiki> 趙秉甲은 동학혁명 지도자 전봉준의 부친을 杖殺(장살)] - 《월간조선》.</ref> 몸이 허약해지더니 이내 사망에 이르게 되는데, 이 일이 전봉준의 동학농민운동과 사회개혁에 대한 생각에도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스스로를 선비라고 칭하며, 농민이기도 하였다.
 
[[1893년]] 그의 아버지 [[전창혁]](全彰赫, 일명 [[전승록]])은 [[탐관오리]]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욕에 저항을저항하다가, 하다가 [[조병갑]]의그의 모친상 때 부조금 2천 냥을 안 거둬 줬다는 이유로 모진 곤장을 맞게 되어<ref>[http://monthly.chosun.com/board/view_turn.asp?tnu=200612100025&catecode=C&cpage=1 <nowiki>[확인취재]</nowiki> 趙秉甲은 동학혁명 지도자 전봉준의 부친을 杖殺(장살)</nowiki>] - 《월간조선》.</ref> 되어, 몸이 허약해지더니허약해져 이내 사망에 이르게사망하게 되는데, 이 일이일로 전봉준의[동학농민] 동학농민운동과운동과 사회개혁에 대한 생각에도[사회개혁'에도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추측한다.주었으며, 스스로를 선비라고 칭하며, 농민이기도 하였다.
 
=== 청년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