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준: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49번째 줄:
[[1890년]] 전봉준은 운현궁을 찾아갔다. 이후 [[1890년]]대 초반 전봉준은 [[운현궁]]에서 [[흥선대원군]]의 문객 생활을 하였다.<ref>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230쪽</ref>
 
[[1892년]] 초 전봉준은 운현궁 문객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고향인 [[전라북도]] 고부군으로 내려와 농사를 지으며 동리 서당의 훈장으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한편 그가 동학교도가 아니라는 의혹이 [[동학 농민 운동]] 당시부터 동학군 내부 사이에 돌고 있었다. 당시 은밀히 세를 불렸으며, 동학 농민운동 당시 은거 중인 흥선대원군과도 접촉하기도 했다.<ref name="글로벌" /> 이는 그가 한때 [[1890년]] 초 잠시 대원군의 식객으로 있었던 인연 때문이었다. [[동학]] 입교 초기인 [[1890년]]에 운현궁에 찾아가 대원군의 식객 노릇을 한 적이 있었으므로, 동학 내부에서는 그의 정체나 목적을 의심하는 교도들이 나타났다. 그러나나타났으나, 1892년 무렵에 교주 최시형(崔時亨)에 의하여 고부지방의 접주(接主)로 임명되었다.임명<ref name="chul1"/> 이로써됨으로써, 그의 정체에 대한 의혹과 의심은 일단 불문율에 부쳐졌다.
 
[[1892년]] [[4월]] 고부 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이 농민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내게 하고 양민의 재산을 수탈하는 행위를 다시 일삼았다. [[조병갑]]은 다시 자신의 아버지의 송덕비를 세운다는 명목으로 세금을 거두었고, 불응하거나 세금을 낼 여력이 없는 백성들을 잡아다가 고문하거나 솥단지까지 빼앗아갔다. [[1893년]] 초에는 고부군에서 물세를 많이 거둬들이기 위해 만석보 밑에 다시 보(洑)를 축조하여 불법으로 세를 징수하자 농민 대표와 함께 연명 상소를 고부군수에게 보내 그 시정을 진정했으나 거부당했다. 전봉준은 상소의 소두의 한사람이었는데, 군수 [[조병갑]]은 전봉준 등 서명한 군민대표들을 잡아다가 공초를 하고 곤장을 쳐서 내쫓았다.
 
[[1893년]] 초에는 고부군에서 물세를 많이 거둬들이기 위해 만석보 밑에 다시 보(洑)를 축조하여 불법으로 세를 징수하자 농민 대표와 함께 연명 상소를 고부군수에게 보내 그 시정을 진정했으나 거부당했다.
[[1893년]] [[2월]] 전봉준은 [[한성부]]로 올라가 [[흥선대원군]]을 방문하였다.<ref name="chul1"/> 대원군은 잠시 식객으로 있었던 전봉준을 후하게 대접하였다. 이때 전봉준은 [[흥선대원군]]에게 "나의 뜻은 나라와 인민을 위하여 한번 죽고자 하는 바"라고 말했다고 한다.<ref name="chul1"/> 이로부터 세간에는 전봉준과 대원군 사이에 무슨 밀약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 돌았다.<ref name="chul1"/>
 
전봉준은 상소의 소두의 한사람이었는데, 군수 [[조병갑]]은 전봉준 등 서명한 군민대표들을 잡아다가 공초를 하고 곤장을 쳐서 내쫓았다.
 
[[1893년]] [[2월]] 전봉준은 [[한성부]]로 올라가 [[흥선대원군]]을 방문하였다.<ref name="chul1" /> 대원군은 잠시 식객으로 있었던 전봉준을 후하게 대접하였다.
 
[[1893년]] [[2월]] 전봉준은 [[한성부]]로 올라가 [[흥선대원군]]을 방문하였다.<ref name="chul1"/> 대원군은 잠시 식객으로 있었던 전봉준을 후하게 대접하였다. 이때 전봉준은 [[흥선대원군]]에게 "나의 뜻은 나라와 인민을 위하여 한번 죽고자 하는 바"라고 말했다고 한다.<ref name="chul1" /> 이로부터 세간에는 전봉준과 대원군 사이에 무슨 밀약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 돌았다.<ref name="chul1" />
 
[[파일:Heungseon Daewongun Portrait.jpg|섬네일|180px|left|[[흥선대원군]]. [[1890년]]부터 [[1892년]] 무렵 그는 한때 [[흥선대원군]]의 식객으로 있었다.]]
 
[[흥선대원군]]과의 면담을 마친 뒤 전봉준은 다시 길을 떠나 [[전라북도]] [[고부군|고부]]로 내려간다. 한성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전봉준은 동지를 규합했다.<ref name="keum1">[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9j0499b002 금구취당과 고부민란]</ref> 전봉준은 강연을 다니며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과, 탐관오리를 처벌하고 새로운 세상이 일어설 것이라는 것과, [[흥선대원군]]이 자신들을 일부 도와줄 것을 약속했다고 했다. 전봉준은 사람을 모았고, 그가 [[흥선대원군]]과도 연결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수많은 청년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1893년]] [[3월]] 무렵 [[전라북도]] 옥구군 금구현 수류면 원평리에 장소에는 한 무리의 동학 농민세력을 형성·영도하게 되었다.<ref name="keum1" /> 이후 그는 자발적인 지원과 기부를 통해 이들의 숙식을 해결하였다. 동도문변(東徒問辨)에 기록된 것에 의하면 그 세력은 1만여 명으로 무장하고 있었다고 한다.<ref name="keum1" /> [[1893년]] [[3월 11일]]부터 시작되었던 동학의 보은취회에 참가하여 그 집회를 반봉건·반부패·반침략의 정치적 운동으로 확대시키기 위해, [[1893년]] [[3월]] 말경에 [[충청북도]] [[보은군|보은]]으로 향했으나, 보은 집회가 [[4월 3일]] 해산됨에 따라 뜻을 이루지 못했다.<ref name="keum1" /> 보은군은 당시 동학의 교조인 [[최시형]]이 종종 머무르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동학도들의 일부는 그보다 앞선 [[2월]] 경 [[한성부]]로 올라가 [[경복궁]] 앞에서 복합 상소를 올렸다.<ref name="p316">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2007.4, 경인문화사) 315~316쪽.</ref> [[2월 11일]]부터 [[2월 13일]]까지 계속된 상소의 내용은 폐정 개혁과 부패 관리 처벌 등이었다. 전봉준은 이들의 상소가 성공하면 호응하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이들과 호응하기로 한 보은집회가 취소되면서 한성부에 올라간 시위대도 해산되었다. 1만 여 명 이상의 많은 인파의 대규모 시위는 한성부의 백성과 조정의 관료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고, 전봉준이 떠난 직후 일어난 이 시위를 접한 [[흥선대원군]]은 [[1893년]] [[2월]]의 동학도들과 농민들의 집회를 주목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