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9 선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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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으로 여유로워졌고 시민의식이 높아짐에 따라 [[자연권|천부인권]](天賦人權)적인 권리를 주장하는 국민들의 요구가 시작되었다. 1985년에 [[한국 전쟁]] 이후 최초의 동맹 파업인 [[구로동맹파업]]이 일어나는 등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는 점차 커져가고 있었다.<ref>근현대사 네트워크, 우리 현대사 노트, 서해문집, 2007, {{ISBN|89-74-83307-7}}</ref> 1987년 1월 [[박종철]]이 [[고문]]으로 사망하자 연일 시위가 그치지 않았다. 한편, 6월 10일 전두환 정권은 제5공화국 헌법에 따라 간접 선거로 치룰 예정이었던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선거|대통령 선거]]의 후보로 노태우를 지명하고자 하였다. 시민들은 이 날을 기해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대대적인 시위를 계획하였다. 6월 9일 [[연세대학교]] 재학생이던 [[이한열]]이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중태에 빠지자<ref>이한열은 7월 5일 사망하였다.</ref>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게 되었고 6월 10일 전국적인 시위가 개최되었다.
 
6월 내내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시위가 계속되자 6월 19일 육군참모총장 발(發) ‘작전명령 제87-4호’이 군에 하달된다.<ref name="중앙일보민병돈">{{웹 인용 |url=https://news.joins.com/article/15308234|제목=[함영준의 사람과 세상] 6·29 직전 軍 출동, 쿠데타 각오하고 막후서 저지|날짜=2014-07-20|출판사=중앙일보}}</ref> 수도권 및 후방에 특작부대를 배치, 계엄사를 운용, 수도 기계화 사단과 항공여단에 육군 지원, 발포 명령은 육군본부에 건의만으로 승인이 그 내용이었다.<ref name="중앙일보민병돈"/> 내전 상태로 번질 수 있는 유혈 사태를 우려한 [[민병돈]] 특전사령관이 명령 취소를 [[고명승]] 보안사령관을 통해서 노태우 대통령에게 건의한다.<ref name="중앙일보민병돈"/> 특전사령관은 명령이 취소되지 않으면 [[제707특수임무단|707대대]]로 청와대를 점령하는 쿠데타까지 염두해둔염두에 둔 상황이었다.<ref name="중앙일보민병돈"/> 군내 반발 여론을 전달받은 대통령은 작전 명령은 엄포용으로 하달하였으나 군을 출동 시키지는 않는다.<ref name="중앙일보민병돈"/> 그리고 며칠 후 29일 노태우는 6·29 민주화 선언을 통해 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한다고 발표한다.
 
== 선언 내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