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카우츠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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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우츠키의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비판은 [[로자 룩셈부르크]]와 공동 노선을 취하면서도 룩셈부르크와는 또 다른 미묘한 차이를 보였으며 이후 이 차이는 점점 더 커져서 사회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로 발전하였다. 룩셈부르크도 사실상 마찬가지였지만, 카우츠키 역시 기존의 [[마르크스주의]]를 옹호하면서 [[자본주의]]의 생명력에 대해 설명해야 했다. 베른슈타인이 주목한 부분, 즉 자본 집중과 집적, 독점화가 나타나지만, 동시에 [[주식회사]]라는 독특한 조직이 부의 분산화 현상에 기여한다는 것과 그 과정에서 소유와 경영의 분리가 나타난 부분을 설명해야 했던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카우츠키는 과소소비론을 내세웠다. 카우츠키의 과소소비론과 기계도입 등으로 자본주의하에서자본주의 하에서 잉여생산은 증가하지만, 노동자들의 임금수준이 낮아 그 잉여를 모두 쓸 수 없고, 자본가들 역시 그 잉여생산을 모두 흡수하지 못하고 과소소비를 하게 된다. 그럼으로해서 자본주의내 위기가 발생하며, 그 잉여자본이 해외로 진출한다. 이리하여 식민주의와 제국주의가 나타나게 되었고, 이로써 자본주의가 아직 붕괴되지 않고 있다고 본 것이다.
 
다 같이 수정주의에 반대하기는 했지만, 카우츠키와 룩셈부르크 간에는 의견상의 차이가 있었다. [[사회주의혁명]]에 대한 전술상의 차이다. 카우츠키는 사회주의혁명에 있어서 노동자계급이 중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에게 사회주의혁명은 객관적 조건이 성숙된 후 필연적으로 되따라오는 것으로 보였다. 서구사회는 아직도 객관적 조건이 성숙되지 않았기 때문에 혁명이 일어나지 않으며 물적 토대에서 아직도 자본주의가 생명을 유지할 여력이 남아있고, 상부구조에서도 노동자들의 의식이 완전히 깨이지 않았다고 본 것이다. 룩셈부르크는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주동성을 높이 평가했다. 노동자들이 주도가 된 계급투쟁을 통해 자본주의의 몰락과 사회주의로 이행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결국 이로 인해서 카우츠키는 당시 우경화되었던 사회민주당 내의 개혁을 중요시하게 여겼으며 이는 결국에는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한 독일참전에 찬성한 [[독일 사회민주당]]과 같은 입장으로서 있게 되었고 결국 이로 인하여 독일 국토와 민중은 종전 이후 피폐해지게 되었다.